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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초반의 반짝 독립: 검암동 셰어하우스

1년 6개월의 독립생활

by 페어 Feb 12. 2025

그때 나는 33살이었다.

다음 일을 못 구하고 집에서만 계시던 아빠와 그 당시에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어 백수였던 내가 집에 있었다.

아빠는 주식 창만 내내 쳐다보았고 나는 책을 읽는 척을 했지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았다.

우리 서로 말이 없었다.

아빠와 함께 온종일 함께 있는 이 집이 너무 답답했다.


가정 경제는 엄마가 꾸려가셨다. 아빠와 나, 둘이 백수인 그때 그 상황 자체가 너무 힘겨웠다.


답답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 당시 페이스북에 올라와있던 글이 마침내 관심을 끌었다. 인천 검암동에서 청년들과 함께 살기 프로젝트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작정 참여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여행용 가방에 옷가지와 책, 생활용품 등을 넣었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었는데 참을 수 없이 한숨만 나왔다. 아빠한테는 어디 간다고 말하지도 않고 집을 나섰다.


친구를 만났다. 혼자서는 결정과 실천이 어려웠다. 그래서 그 당시 독립을 꿈꾸던 친구 하나와 같이 가게 된 것이다. 빈손으로 가기는 좀 그래서 바나나 한 다발을 사다가 그 셰어하우스에 갔다.


전에 한번 문의차 방문했다. 듣기로 우리동네사람들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하는 프로그램으로, 3개월인가 6개월인가 (이제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청년들이 함께 살아보는 셰어하우스 생활이라 했다.

방문한 우리에게 복층 구조로 된 빌라를 보여줬고, 집을 볼 줄도 몰랐던 나는 그 정도면 되었다고 흡족해다.

독립이 그냥 좋았던 것이다.


그 당시 월세는 얼마였더라, 25만 원인가 30만 원이었다. 생활비는 한 사람당 10만 원씩 냈던 것 같다.

멤버는 나와 친구. 다른 여성 두 분. 남성 두 분이었다.

일층은 남자들이 쓰고 이층은 여자들이 쓰기로 했다.


그쯤 나는 법당에 다니고 있었는데 매주 다니는 게 아니라 어쩌다 한 번씩 다녔다.

랜만에 나는 거기서 만난 동갑내기 법우를 만났다.


나는 그 법우에게 자랑을 했다. 나 독립한다고.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사는 집인데 어때. 멋지지 않니?"


그 법우도 보여 줄 것이 있다며 나에게 휴대폰으로 웬 집 사진을 보여주었다.

"우리 신혼집이야, 예쁘지?"


뭐지 싶다가 그 법우가 곧 결혼을 앞두고 있음을 상기했다. 그 법우는 삼성전자에 다니는 예비신랑 결혼하는데 직장 근처에 집을 얻었다고 했다. 사진을 보았지만 집알못인 나라서 좋은 건지 어쩐 건지 몰랐지만 벌써 내 집이 생긴 법우가 부럽기는 했다.


내 집이 있는 법우에게 내가 들어간다는 셰어하우스는 얼마나 조악해 보였을까.

남들은 결혼해서 신혼집에 살 때, 나는 첫 독립으로 셰어하우스에서 사는 건데 이건 뭐 격차가 너무 크잖아.


그래도 나는 처음 독립했던 인천 검암동 셰어하우스 생활을 돌아보면 좋은 기억이 많다.

내가 지닌 돈으로는 혼자서 살 집을 구할 수도 없었지만, 셰어하우스에서는 월세와 생활비만 내면 본가를 떠나 독립도 하고 새롭게 만난 친구들과 함께 살면서 지낼 수 있기에 만족했다.


나는 독립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직장을 구하기로 했다.

검암동 셰어하우스에 살면서 머지않아 디자인 회사에 에디터로 취직했다.

회사 생활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지만, 셰어하우스에 계속 살기 위해서 일을 계속했다.


그렇게 1년 반쯤 됐을까. 하우스 메이트들과는 죽이 잘 맞았다. 원래 3개월인지 6개월인지 했던 프로그램이 끝나고도 모두 계속 그 셰어하우스에 같이 살면서 친밀해졌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밥상모임이란 것열어 밥을 같이 먹고 서로의 일상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첫 독립은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다들 독립하면 독립의 자유를 충분히 누린다고 이것저것 활발하게 하던데, 나는 딱히 자유를 찾을 것도 없었다. 회사에 다녀오면 피곤했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별다른 취미나 하고 싶은 활동은 없었다. 가끔 하우스 메이트들과 어울려 놀 때면 즐거워했다.


그런대로 무탈한 하루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그쯤 가끔 연락만 하던 엄마, 동생이 부쩍 나에게 자주 연락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동생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해. 아빠가 대장암이래."


왜 그랬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짐작하건대 첫째 딸이라는 책임감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는 다시 본가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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