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막과 내리막의 굴레
원래대로라면 9코스는 지난주에 밟아야 했다.
지난주 휴일이 끝나면 다가올 워킹데이에 무리한 업무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난 휴일에 무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 내내 힘써가며 일하고 맞이하는 휴일이었다. 이틀 중 앞 휴일에 둘레길을 걷고 친구와 놀기로 했다. 9코스를 검색해 봤다. 처음 맞이하는 '상급자 코스'였다. 초급자 코스에서 곱게 걸어오던 내겐 상급자 코스는 너무 무섭게 다가왔고, 예상 소요 시간 4~5시간은 도저히 걷고 놀러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내일에 나에게 넘기고 그날은 놀러 나갔고 새벽에 귀가했다.
한 다섯 시간은 잤을까. 아무리 상급자 코스가 무서워도 피하면 또 결국 둘레길 걷기 챌린지가 무산될 것 같았다. 일어나서 씻고 집을 나섰다. 전날 술을 좀 마시긴 했는데 심한 숙취는 아니었고 머리가 살짝 아픈 정도의 컨디션을 가지고 수서역으로 향했다. 요즘 느끼는 건데 체력이 좀 좋아지는 것 같다. 하루 종일 나가 놀고도 아침에 등산하다니.
수서역에서 시작한 코스는 곧이어 냅다 등산으로 이어졌다. 굉장히 숨이 찼다. 코스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니었는데 몸이 너무 무거웠다. 다른 날은 둘레길을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그래도 무척 몸이 가벼웠는데 오늘은 시작부터 달랐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오르려니 너무 힘들었다. 이제 막 걸었는데 둘레길 마지막 단계의 체력 상태였다. 뭔가 불안감이 엄습했다. 4~5시간 코스라는데 어떡하지.
오르다가 쉬고, 오르다 쉬고 그랬다. 너무 힘들었다. 물을 좀 마시고, 챙겨 온 블루베리를 먹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걸었을까. 컨디션을 회복했는지 몸이 가벼웠다. 마침, 오를 만큼 오르고 평지는 아니지만 완만한 구간이 나타났다. 친구와 메시지를 나누면서 '아, 이제 좀 살겠다. 얼른 내려가서 맛있는 것 먹어야지~'라고 보냈고 그게 이날의 플래그였다.
두 개의 산을 중간에 연결해서 가는 길이라 그런가? 보통의 산처럼 계속 끝없이 오르다가 드디어 정상을 찍고 이제 기쁜 맘으로 내려가면 차라리 성취감이라도 있을 거다. 열심히 올라오고, 내 무릎 갈아가며 열심히 내려갔다. 차 소리도 들리고 이제 거의 끝나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연 다시 오르막 계단이 나타나고 다시 내려가고, 다시 올라가고 다시 내려간다. 뭐지? 이 짓을 왜 하는 거지? 등산도 사실 어떻게 보면 열심히 올라가고 내려가는 행위이긴 하지만 위에 올라가서 하늘도 보고 풍경도 내려다보고 하지 않나. 이건 시지프스의 형벌이다. 영원히 오르고 내리는 고행이다. 그때 깨달았다. 이 코스는 어려워서 상급자 코스가 아니라 인내심이 '상급'으로 필요하다. 반복되는 오르내림에 체력이 바닥난 것은 물론이고 내 인내심도 바닥났다. 사실 둘레길의 매력은 도심을 가로지르고, 탄천 길도 좀 걷고 하는 데서 여유로움을 느끼는 건데, 내내 등산을 하면서 똑같은 풍경(그것도 예쁜 산도 아님)만 보면서 걷는 것도 지치는데 성취감도 앗아가다니. 겨우 올라가면 다시 내려가고 겨우 내려가면 다시 올라간다. 열을 받으니 더 걷기 힘들고 이미 땀범벅인 몸은 빨개지기 시작했다.
나는 예전부터 그랬다. 병원에 가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게 잘 참는다. 의사 선생님들이 놀랄 정도로 미동도 없다. 무던해서이기도 하지만 아픔을 느끼긴 하는데 아프다고 해서 치료 안 할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내가 아파해서 약하게 강도를 바꾸면 안 나을 것 같아서 참는다. 근데 내가 못 참는 건 반복되는 아픔. 10만큼의 아픔을 한 번에 견디는 게 낫지 3만큼의 아픔을 10번 느끼는 건 참을 수가 없다. 예전부터 성미를 가졌다.
마음을 비우고 일주일간의 스트레스를 날리러 산에 왔는데 이렇게 스트레스받기는 처음이다. 일할 때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느낀 것 같다. 나 자신도 어이가 없다. 이쯤에서 확실히 해두자면 등산 고수들은 코웃음 칠 난이도의 산이다. 절대 가파르거나 어렵진 않다. 다만 앞서 밝힌 것처럼 나는 낙엽 인간이고, 내 인내심과 지구력이 한계가 있을 뿐. 근데 문제는 이렇게 희로애락을 겪는 와중에도 길이 끝나질 않는다.
뭐지, 이 길은…? 이 지옥의 9코스 뭐지…?나중에 알고 보니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장 거리 코스라고 불리는 코스였다. 어쩐지. 마지막에는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도대체 이 길은 언제 끝나는 거야!"라고 소리쳤다. 분명 앞서 걸을 땐 콧노래를 부르며 걸었었는데.. 심지어 <보랏빛 향기>를..
거의 울분을 토하는 중 겨우 도심의 땅을 밟았다. 함께해서 힘들었고 다시는 보지 말자 9코스. 반전으로 아직도 안 끝났다. 더 걸어야 한다. 원래는 이제 도망갈 수 있으니 그만 걸으려다가, 그래 어디까지 가나 보자 하고 계속 걸었다. 마지막 끝에 도착해서, 벤치에 벌러덩 누웠다. 드디어 끝났다. 앞으로 다른 코스도 이딴 식이면 때려치운다, 이거. 지옥의 9코스가 끝이 났다. 근데 나는 세 시간 만에 끝난 걸 보면 내가 너무 빨리 걸은 건가, 주변 경관도 보면서 천천히 갔으면 나았나? 싶다. 원래는 끝나고 맛있는 식사까지가 루틴의 완성인데, 끝난 도착지가 양재라 오손도손 동네 밥집 느낌이 안 나기도 하고, 숟가락 들 힘도 없어서 조속히 귀가했다. 나도 날 이해할 수 없는 건, 집에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서 장도 봤다. 나도 장 본 것들을 들고 가면서 광기다.. 싶었다. 집에 와서 시원하게 땀을 씻어내고 나니 그제야 뿌듯함이 밀려왔다.
아마 둘레길을 걷지 않기로 했으면 해장을 한다며 건강에 안 좋은 음식을 먹고 늘어져서 유튜브나 보며 하루를 보냈을 거다. 게다가 둘레길을 이번 주도 안 걸었다는 굉장히 찝찝함을 안은 채로. 이 컨디션, 이 무거운 몸으로 이런 험난한 길을 걸은 나를 칭찬했다. 다음 코스는 이제 잘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힘도 생겼다. 역시 달콤함만이 행동을 지속시키는 게 아니네.
* 주의: 무릎이 약한 자는 9코스를 조심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