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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2 때까지 늘 첫째 줄에 겨우 160이

공허한 마음 가득 안고 걸은 7코스

by 젊은 느티나무

대부분의 학생들이 일본 만화에 푹 빠져있을 때, 나는 심슨을 좋아했다. 사실 심슨도 그렇게까지 많이 본 건 아니었고, 특별히 만화와 함께 자라나지 않았다. 아무리 <슬램덩크>가 영화로 나와 유행할 때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본 적이 있었어야 말이지. <진격의 거인>이나 기타 등등의 많은 일본 애니메이션도 전혀 관심이 없다. '일본 만화'라는 것 자체가 내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고, 그리고 대단한 애국자는 아니지만 일본 문화를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옆 나라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일본 제품을 쓰고 일본 영화를 볼 수는 있겠지만, '마니아'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요새는 거리 어딜 나가도 일식집, 이자카야가 즐비하고 하물며 아예 일본어 간판인 식당들도 많다. 아무래도 같은 아시아권이고 미니멀하고 심플한 무언가를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일본 영화, 만화, 디자인이 더 와닿는 것 같다. 일본 여행도 주변에 안 간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이들 가는 게 사실 못마땅했었다. 본인이 번 돈으로 본인들이 가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일본에 돈 벌어주면 안 되는데, 생각했다. (꼭 이런 이야기하면 내가 소비하는 일본의 '무언가'를 꼭 집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완전무결한 사람만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건 아닌데.) 그렇게 흥선대원군처럼 살기를 수년.. 지금은 그 마음이 흐려졌다기보다는, 나 혼자 탑 쌓고 고립된 느낌이 들어서, 싫어할 땐 싫어하더라도 왜 그렇게들 좋아하는지 마음을 열고 다가가보자고 문화 개방 시기를 보내고 있다.


친구랑 대화를 하다가 언젠가 <H2>라는 일본 만화가 가장 손꼽는 좋아하는 만화라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튜브가 지루해져서 오랜만에 만화나 볼까, 하다가 우연히 <H2>를 발견했고 한번 봐볼까, 하다가 어제 마지막 장을 덮었다. 완결까지 본 게 대체 얼마만인지. 나는 '청춘, 성장, 로맨스' 이런 것에 가슴 떨린 적이 없는 사람인데, 책을 덮고서 여운이 종일 이어졌다. 머릿속에서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잊히지가 않았다. 연출을 왜 이렇게 섬세하고 담백하게 해 놔서.. 그렇게 그들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잠든 후, 다음 날 아침 8시 반에 집을 나섰다.


지난주에 6코스, 고덕역에서 끝났으니 다시 고덕역으로 간다. 지난주에 끝낸 길목에서 이번 주에 새로 다시 시작하는 것, 재밌다. 고덕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델리스파이스의 <고백>을 한곡 반복으로 들었다. 원래도 이 노래가 워낙 명곡이라 좋아했는데, 만화와 연관성이 있다고 하니 거의 주제가 수준으로 이 노래만 들으면 그 애들의 생각이 나는 거다. 한참을 3411번 버스 안에서 히로와 히까리를 생각했다. 진짜 있는 애들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마음이 싱숭생숭한지.. 이제 작품이 끝나서 그들의 세계에서 나만 홀로 남겨진 느낌이라 그런가, 아님 그들이 선택한 길 때문에 그런가, 아님 내가 요새 워낙 청춘, 열정, 꿈과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어서 그런가. 단지 좋은 작품을 보고 여운이 깊은 느낌이 아니라 약간의 공허함까지 느껴졌다. 이건 더 이상 작품의 문제가 아니다. 내 문제다. 나 뭐가 고장 난 거지.


그런 마음을 안고, 7코스 시작점 앞에 도착했다. 7코스는 일자산 코스로, '도심 속에서 만나는 숲길'이라고 하길래 평평한 숲길을 걷나 보다, 했다. 첫 시작은 명일근린공원.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는데, 공원치고는 꽤나 경사가 있었다. 그런데 강동구에서 자연 걷기 코스를 굉장히 공들여 관리하는지, 벤치도 많고 뭔가 공원이 잘 갖춰져 있었다. 지난 코스는 고덕산이 뒷순서라 초급자 산임에도 굉장히 헐떡이며 갔는데, 이번에는 초반 코스라 경사는 있었지만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공원을 지나갔다.


그리고 일자산을 만났는데, 우선 들어가는 등산로가 꽤나 가파르고 험해서, 하남과 서울의 경계라 둘 다 여기는 신경 안 쓰는 건가, 했는데 그 등산로만 그런 거였다. 조금 더 오르니 꽤나 넓고 쾌적한 산을 만날 수 있었고, 놀랍게도 중간중간에 쉬기도 하고 운동할 수도 있는 공터가 있는데 산악회원들이 굉장히 많았다. 현수막을 보니 '일자산악회'라고 쓰여 있었는데 정기적인 모임을 하는 산인가 보다. 삼삼오오 어르신들이 모여 계셨다. 나이 들면 왜 산악회를 하는지 알 것 같다. 사교적이고 건강하고. 끝나고 맛있는 것 먹기도 좋고. 나도 아마 나이 들면 산악회 할 것 같다. 그렇게 생기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기분이 좋다.


이번 코스는 전반적으로 오르락내리락 산길이 많아서 인상 깊은 구간이 있진 않았다. 이제는 둘레길 따라가는 게 익숙해져, 휴대폰도 안 보고 리본과 안내판만 보며 걸었다. 그렇게 마지막 코스까지 끝내고. 7코스와 8코스의 갈림길에서 돌아섰다. 다음 주는 내가 또 이 포인트에 도착해서 반대로 걸어가겠지.


마지막 코스가 끝난 곳은 오금 1교였는데, 어딘지는 잘 모르지만 조금 더 이동하면 올림픽공원, 방이동 같은 내가 아는 동네가 있는 곳이었다. 아는 곳에 가서 유명한 식당에서 밥을 먹을지, 온 김에 이 동네에서 먹을지 고민하다가 근처 초밥집엘 갔다. 공휴일이라 그런지 점심시간인데도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니까 등산할 때는 한 번도 작품 생각이 안 났다. 걷기 시작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음악 들으면서 히로랑 히까리 생각뿐이었는데도, 등산을 시작하니 길을 찾고 바삐 올라가느라 잡생각이 안 났다. 뻔한 이야기지만 이래서 생각이 많으면 산엘 오르는군, 하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특이하다고 생각한 게, 명일근린공원을 오르는데 나무에 '쓰레기를 버리지 맙시다.' 또는 '산불조심'이 아니라, '생명, 포기하지 맙시다.'라는 자살 방지 표지판이 많았다. 삶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이 그 시름을 잊고 싶어서 산에 오르는 건가라는 생각을 했다. 확실히 현실의 문제는 해결해주지 못해도 스트레스는 덜어줄 것도 같다. 우리 모두 산에서 생명력을 얻어갑시다.


나온 김에,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으려고 집 가는 길에 만화방에 들렀다. <H2>는 야구 만화라 다른 야구 만화로 이들을 지우고 싶지 않아서 수영 만화인 <러프>를 읽으려고 했는데 그 만화방엔 없었다. 내가 주로 가는 만화방은 무협지 전문이라 순정만화 쪽은 그리 많지가 않은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같은 작가의 또 다른 야구 만화를 읽었는데 역시 재밌었지만 히로와 히까리가 이미 마음속에 들어와 버려서 미나미와 타츠야에 몰입이 잘 안 되었다. 그런 것치고는 두 시간 넘게 읽어, 4편까지 읽고 덮었다. 됐다 이제. 야구 만화는 더 보지 말자. 그래도 집을 나설 때보다는 한층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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