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걸어보는 8코스 둘레길
보통 둘레길을 걷는 날은 정해져 있다. 휴일 중에 하루는 쉬고 그다음 날 오전에 둘레길을 걷는데, 요새 일이 너무 바빠서 그날 오전에 잠시 일을 해야 했고, 끝나고는 친구를 만나 놀았다. 결론. 둘레길을 못 걸었다.
바쁘면 그럴 수 있다고 계획할 때부터 염두에 두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도 아니고, 그리고 그만큼 바쁘지 않았다. 그냥 노는 게 더 좋았을 뿐. 그런데 놀다가 글 올리는 것도 놓쳐버려서 어차피 한 주가 넘어간 김에 이번 주는 가지 말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가, 이번 둘레길은 평일에 퇴근하고 걸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8코스. 퇴근하고 걷기 적절한 코스일까. 알아봐도 됐지만 알아보면 가기 싫어질까 봐 초급자 코스인 것만 보고 가보기로 결심했다. 대신, 늘 둘레길을 걷고 동네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었으니, 이번엔 보상으로 저녁에 탄수화물을 잔뜩 허락해 볼까? 떡볶이를 먹고 둘레길을 나섰다.
모든 둘레길 코스는 출발점과 도착점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암묵적으로 시계방향으로 돌고 있었는데, 이번 코스는 회사와 집의 위치를 고려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기로 했다. 그러니까, 원래는 오금 1교 > 수서역 방향이어야 되었지만 수서역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우선 퇴근이 비교적 이른 편이라 식사를 다 마치고도 그렇게 어둡지 않았다. 사실 퇴근 후 둘레길은 다른 것보다 너무 어두워져서 산길 같은 곳은 위험할까 봐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대략 6시 반쯤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수서역은 워낙 주변이 밝기도 하고 그래서 대낮 같은 하늘에 조금 안심했다. 이렇게 도심에서 시작하는 건 좀 생소했는데 곧 탄천길로 빠졌다.
아직 세 코스 밖에 안 걷고 할 말은 아니지만, 앞으로 누군가 내게 '둘레길 중 하나만 걸어야 한다면 추천해 주세요.' 한다면 단연 8코스를 내밀겠다. 도심 속에서 몇 걸음 걸었을 뿐인데 큰 탄천을 지나는 평화로운 풍경이 나오고, 그다음엔 아주 큰 나무들이 서 있는 길을 만난다. 나는 길 양옆에 큰 나무가 쭉 늘어서 있는 길을 어릴 때부터 참 좋아했는데, 이 길이 딱 그랬다. 이국적인 풍경, 선선한 바람, 그리고 걷고 뛰는 사람들. 아마 낮에 걸었으면 덥고 오히려 이 느낌이 안 났을 거다. 해가 살포시 진 풍경이 참 잘 어울리는 길이었다.
기분 좋게 그 길을 걷다 보면 이제 올라가서 아파트 단지 쪽으로 들어선다. 강아지 산책 시키는 사람들,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걷는 주민들. 그렇게 좀 걷다 보면 공원으로 들어간다. 이 공원도 신기하다. 나무가 엄청 많고, 이제까지 다른 코스들이 있었던 공원들은 좀 더 산과 공원 사이였는데, 이 공원은 되게 걷기 좋은 공원이다. 아마 '송파둘레길'로 구에서 잘 다듬어둔 길 같았다.
이 길을 걸으면서 자꾸 좋아하는 사람들 생각이 났다. 이 길 함께 걸으면 참 좋겠다. 이 길, 이 친구가 참 좋아하겠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 길을 걸으며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면 좋겠다. 그런 생각들을 했다.
이 길이 유독 걷기 좋은 평평한 길인 것도 있겠지만, 아침에 걸을 때는 이 따뜻한 가로등이 없다. 가로등 아래를 걸으면서, 그 노란빛을 받으면서 자꾸 예전에 거닐었던 추억들이 생각나는 거다. 운이 정말 좋다고 생각했다. 사실 운 같은 게 다 뭐야, 그냥 우연이 겹쳤을 뿐인데 우리가 다 지어낸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스물 한 코스 중에 퇴근하고 저녁에 걷기에 가장 좋은 코스가 아닐까, 난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 나무가 빽빽한 공원을 지나면 성내천 길이 나온다. 우리 집 근처에도 한강이 있어서 걷기가 참 좋지만 일방향이라 그런가, 그렇게 따뜻하고 가족끼리 산책하기 좋은 느낌보다는 걷고 운동하고 자전거 타기에 좋은 길인데, 역시 하천길은 오고 가는 길이 있어서 그런지 따뜻하다. 뭔가 한강보다 더 평화롭다. 아무래도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한강과 물소리 내면 흘러가는 하천은 다르겠지. 성내천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이, 부부들이 나와서 도란도란 걷는다. 손을 잡고 걷기도 하고, 다들 웃는 낯이다. 평화롭고 조용하다. 하루를 마친 사람들의 한적함이 느껴진다. 저녁을 마무리한다. 여기 사는 사람들 정말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로 기분 좋아지는 코스였다. 피곤했는데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둘레길을 걷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