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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깊은 산속 댄서

이 여름 마지막 둘레길, 10코스. 잠시 여름 방학

by 젊은 느티나무

오늘은 10코스를 걷는다. 지금 둘레길 챌린지의 시작이 되었던. 우면산을 우연히 걸으며 걷기로 다짐했었지. 이미 걸은 셈 치고 다음 코스로 갈 수도 있었지만, 10코스를 다 걸은 건 아니었으므로. 10코스를 오며 감회가 새롭다. 10코스 시작은 내가 시지프스의 9코스를 끝내고 거의 기어가듯이 여정을 마쳤던 매헌시민의 숲이다.


아직 오늘로 다섯 번째 코스이지만, 내 선호도는 분명하다. 얼마든지 걸어도 좋다. 나는 평지가 좋다. 그러지 못할 거면 시작이 평지, 도심이었으면 좋겠다. 다짜고짜 산부터 올랐던 코스들이 내게는 좀 힘들었던 것 같다. 특히 요새는 일이 바빠 2주에 한번 걷는데, 한껏 물 먹은 솜 같은 몸을 데리고 등산을 하려니 영 힘이 든다.


10코스는 시작 방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쪽은 매헌시민의 숲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는 건 평화로운 평지에서 시작한다는 것이지. 숲에는 소풍 나온 아이들과 선생님이 있다. 역시 평일 아침은 한적하다. 코스를 진행할수록 더워지는 날씨에 걱정이 앞선다. 처음 걸을 땐 5월이었고, 아직 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날씨였기에, 산행이 고되어도 걸을 만했다. 날씨가 좋았으니까. 9코스 때부터 느낀 거지만 점점 날이 더워지고 내 얼굴은 벌게지고, 벌레들은 많아진다. 평소보다 난이도가 훨씬 올라간다. 숨이 더 가빠진다. 평소엔 나뭇가지에 긁힐 수도 있고 벌레에 물릴 수도 있어서 얇은 바람막이를 입고 둘레길을 걸었는데 오늘은 반팔에 헐렁한 바지, 그리고 샌들을 신었다. 샌들은 좀 모험이었는데 너무 더울 것 같아서 선택했다. 가방엔 스테인리스 물통에 물을 담고, 간식을 좀 챙겨갈까 했는데 집에 마땅한 게 없었다. 그냥 나선다.


오늘은 사실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숨 막히는 공기를 가르고 지하철 역, 개찰구 앞에 섰는데 지갑이 없다. 분명 짐 챙길 때 지갑을 봤었고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가방을 헤매는 내 손은 비어있다. 한 3주 전쯤에도 바보 같이 지갑을 놓고 와 외근지까지 택시 타고 출근한 적이 있어서 정말 나 자신한테 화가 났었다. 조금만 더 꼼꼼히 챙겼으면 지각할까 걱정할 일도, 시간을 까먹을 일도, 출근하는데 쓸데없이 택시 탈 일도 없었는데. 좀처럼 남에게는 화나는 법이 없는 사람인데 멍청한 나에게 너무 화가 났었다. 그래서 교통카드를 사다가 역사 내에 숨겨둘까도 생각했다. 그러다 오늘. 도저히 다시 집에 갈 용기가 나지 않는 이 날씨에 또. 순간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욕이 입술 새로 새어 나온다.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옷을 한번 갈아입었었는데 그때 가방에서 빠진 걸까. 역사 내 atm기가 한번 리뉴얼되면서 카드 없이 출금이 안되어서 (정확히는 별도 등록 필요해서) 가진 계좌를 다 시도해 보다가 때려치웠다. 진짜 욕이 절로 나온다. 지갑을 챙기는 1초면 되는 시간 때문에 대체 왜 이 난리를 치는 거지. 결국 근처 편의점으로 간다. 심지어 길 건너라 뙤약볕에서 신호를 두 번이나 기다려야 했다. (하필 사거리) 지난 9코스 때도 그랬지만 날이 더우니 금방 화가 난다.


교통카드 충전은 현금만 가능하다. 그래서 편의점 앞 atm에서 만원을 뽑아, 티머니를 사서 충전했다. 하.. 시작부터 이렇게 진 빠지고 기분 잡치면 안 되는데.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기분 좋아지는 음악'을 검색한다. 몇 가지 노래가 나온다. 출발지에 도착할 때까지 악동뮤지션 1집을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출발점에 도착했다. 그리 기분이 많이 회복되진 않았었는데 그래도 숲길 걸으니 좀 낫다. 10코스 명칭이 산속에서 보는 서울길이기에 산을 걷는다는 것을 예상했다. 그리고 지난번에 우면산에서 만난 게 10코스니까. 머지않아 산 입구를 맞이했다. 다섯 코스째에 또 깨달은 건, 둘레길은 대부분 산을 포함하고 있는데 산 입구가 특히 난이도 헬이다. 그 부분을 지나면 좀 낫다. 아무래도 평지에서 산을 들어가는 거니까 경사가 가파른가 보다. 역시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숨이 찬다. 오늘 코스는 중급자 코스였는데, 역시? 생각을 하며 걷는데 점점 얼굴에 열이 오른다. 너무 힘들다. 초입부터 물을 한참 들이켰다. 그리고 가파른 산길보다 더 힘든 건, 한증막 같은 습한 날씨, 그리고 무엇보다 날벌레들이다. 원래도 많았겠지만, 유일하게 이산화탄소를 미친 듯이 뿜어내는 인간이 지나가서인지 온갖 벌레들이 얼굴 앞으로 달려든다.


혹시 자신의 희미한 존재감에 마음 쓰이던 사람이 있었다면, 한 여름에 등산을 해보시라. 나의 존재감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벌레들이 1초도 가만 놔두지 않고 달려드니까. 눈앞에 거슬리는 날파리들보다 더 거슬리는 건 귀 옆에서 윙윙거리는 파리들인데 (아마도 파리겠지?) 잠자리에서 귀 옆에 모기 소리 들리면 소름 끼치는 것처럼, 파리 소리도 굉장히 크고 가까이 들리기 때문에 소름 끼치긴 마찬가지다. 이 글의 제목이 의아했다면, 이제 그 뜻을 알 수 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양손을 휘휘 저으며 벌레들을 내쫓느라, 다리만큼 팔도 바쁘다. 누가 보면 춤추는 줄 알았을 거다. 온몸은 뜨겁고 벌레들은 거슬리고, 더 이상 둘레길을 즐기고 있지 않았다.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었다. 이게 맞는 건가?


만약 인간에게 '벌레가 당신을 절대 물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벌레가 당신의 귀에 내내 윙윙 거리거나 당신의 몸을 기어 다니는 느낌이 나는 편이 좋냐, 아님 몸에 절대 닿진 않지만 당신의 바로 눈앞에, 언제라도 내 눈이나 코 같은 구멍 속으로 들어올 것처럼 계속 보이는 게 낫냐'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그 벌레들과 함께 등산하면서 얼굴이란 무얼까라는 생각을 했다. 원숭이가 내 팔에 뽀뽀하면 싫지만 그냥 그럴 것이다. 그런데 원숭이가 내 볼, 내 입술에 뽀뽀하면 아마도 끔찍하겠지. 왜 인간은 얼굴에 민감할까. 피부가 얇아서? 얼굴이 곧 '나'인 것일까. 듣고, 먹고, 말하고, 보는 것들이 다 모여있는 곳이라 그런가. 생각해 보니 고양이 같은 동물들도 자기 머리만 가리면 자기가 안 보이는 줄 아는 것 보면 인간만 그런 게 아닌가? 힘든 산행을 하면 잡생각이 없어지고 또 다른 잡생각이 생긴다. 이미 지갑 놓고 와서 열받은 건 기억도 안 난다. (아, 그렇게 사온 교통카드를 찍고 주머니에 넣었는데 지갑은 주머니에 있었다. 이 정도 멍청함과 이 정도의 비효율이 내 인생의 가장 큰 불행이라면 기꺼이 견디겠다.) 결국 윙윙 거리는 벌레소리를 이기지 못하고, 이어폰을 낀다. 가장 좋아하는 노랠 듣는다. 처방약 먹듯이. 기분이 나쁠 때마다 그 노랠 들으면, 나중에 그 노랠 들었을 때 기분 나빴던 기억이 날까 봐 아껴듣는데,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아직은 효과가 있다.


그리고 또, 둘레길의 특징은 아무리 잠깐이어도 힐링구간이 있다.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않는 평지 구간인데, 이때 두 다리와 무릎이 잠시나마 쉬고, 나도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며 상쾌한 공기를 마실 수 있다. 이번 코스는 그 힐링구간이 꽤 넉넉한 편이었다. 인류의 역사적 발명을 한 만 가지 정도 꼽는다면 그 자리에 데크길을 넣어주고 싶다. 자연도 즐기고, 운동도 되고! 조금 오래 돌아가지만 뭐 어떤가. 급한 일도 없는데. 데크길에서 천천히 걸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우면산은 '데크길'이라는 명칭이 아닌 '무장애숲길'인가 하는 이름을 쓰고 있었는데, 나이가 많거나, 유아차, 휠체어가 있거나 하는 사람들에게 참 좋겠다. 그리고 나 같은 낙엽인간들에게도.. 그렇게 데크길을 즐기는데 야속하게 주황 리본이 데크길이 아닌 옆 등산길에 걸려있다. 이제 그만하고 이리로 와,라는 듯이. 데크길을 뒤로하고 다시 등산을 한다. 한참 평지를 걷다가 다시 오르려니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 얼굴은 식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까 물을 너무 많이 마셨나, 화장실도 가고 싶다. 더 물도 못 먹는다. 힘들어서 쉬고 싶어도 벤치에 앉으면 습기 가득한 더운 공기가 온몸을 감싼다. 차라리 그냥 빨리 걷고 빨리 하산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그냥 계속 걷는다.


아까 샌들을 신을 때부터 예상했다. 점점 발이 아프다. 등산화를 하나 장만해야겠다. 결코 안 신고 처박아두더라도 내 발목은 지켜야지. 코스 후반부는 돌길이었다. 지압체험 수준으로 발을 고문시키고 드디어 끝났다. 10코스의 끝은 사당이다. 굉장한 도심에서 끝나는 이 길에서 나는 얼굴이 벌게져서 걷는다. 점심장소로 고른 초밥집이 15분 거리다. 어쩔 수 없다. 그래도 간다. 잠시 카페나 올리브영에라도 들러야 하나 할 정도로 너무 온몸이 뜨겁다. 역시 더 이상 인간이 살 환경이 아닌데 인간들이 장비나 기계를 개발해 가면서 꾸역꾸역 살고 있는 거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살인 더위다. 거리를 걷는 시민들도 모두 더위에 지쳐있다. 가는 길에 공사현장이 있다. 이 더위에 공사라니. 그 옆에는 폴라포 껍데기가 놓여있다. 아이스크림을 먹어가며 겨우 겨우 공사를 해내는구나. 오랜만에 도심에서 끝난 둘레길에서 더위에 대한 복잡한 심경이 든다.


초밥집에 겨우 도착해서 내 손으로 시켜본 적이 손에 꼽는 탄산음료와 초밥세트를 시키고 화장실로 간다. 거울을 보니 누가 봐도 수상한 사람이 하나 있다. 온 얼굴이 빨갛다. 이 사람은 대체 뭘까 싶으셨으려나. 목까지 세수를 시원하게 한다. 아무리 찬물로 닦아도 차갑지가 않다. 앉자마자 물과 사이다를 벌컥벌컥 마신다. 더 이상 둘레길을 걷다간 황천길 간다. 초가을이 올 때까지 잠시만 멈춰야겠다, 생각했다. 이렇게 덥고 벌레가 많으면 둘레길이 고행길 밖에 안된다. 즐길 수 있을 때 돌아온다.


아직 생각이 정리가 되진 않았지만, 가을이 오기 전까지는 모르는 동네 탐방을 해볼까, 싶다. 물론 동네도 미친 듯이 더울 것이다. 그래도 도심은 지쳐 쓰러질 때쯤 카페라도 가고 영화관이라도 갈 수 있지 않나. 아님 미술관 탐방을 해볼까? 그렇게 잠시 여름방학을 갖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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