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 끝났습니다. 11코스를 걸어봅시다.
아침에 출근하러 집을 나섰는데, 오랜만에 찬기운이 느껴진다. 원랜 집을 나서면 습하고 더웠었는데 선선한 바람이 느껴지는 거다. 가을이다. 드디어 가을이 왔다.
나는 가을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가을이 오면 너무도 설레고 너무도 불안하다. 눈 깜짝할 사이 가을이 가버릴까 봐. 그렇게 가을을 맞이하고, 다시 둘레길을 걷기로 했다. 사실 아직도 아침엔 좀 선선하지만 낮엔 더워서 둘레길을 걸을 때도 아마 더울 것 같긴 했는데, 올해 안에 다 걸으려면 어쩔 수 없다. 서둘러야 한다. 생각보다 오래 쉬었다.
정말 오랜만에 지난 10코스가 끝났던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직은 더울 것 같아 반팔에 긴 리넨바지, 그리고 지난 7월에 겪고도 귀찮아서 등산화를 안 샀기 때문에 그냥 스니커즈 운동화를 신고, 물통을 담아 걸었다.
역시 아직 더웠고 아직 벌레가 많아서 살짝 후회했다. 아직 복귀는 일렀나. 그리고 참 습했다. 역시나 어쩔 수 없이 벌레 소리가 너무 스트레스라 이어폰을 꼈다. 벌레 소리가 듣기 싫어서 이어폰을 끼는 건, 불이 자주 나는 곳으로 내 발로 찾아가 놓고 화재경보기를 끄는 건가? 벌레 소리가 들리는 건 벌레가 가까이 있다는 거고, 벌레를 피할 수 있는 알림이 되는 건데, 그걸 차단하고 온몸으로 벌레를 맞이하는 건가?라는 생각은 했지만, 벌레가 있어도 난 이 길을 가야 하고 어차피 벌레를 맞아야 하는 운명이라면 소리라도 안 듣겠다는 거다.
나는 내가 스니커즈를 신고 등산을 할 때부터 언젠가는 넘어지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전에도 일상생활 중에도 넘어질 뻔했는데 가까스로 안 넘어진 적이 꽤 있었는데, 그 무신경한 걸음들의 카르마가 쌓인 건가. 드디어 넘어졌다. 드디어라는 표현이 좀 웃기지만. 기어코? 마침내? 결국. 모래가 깔린 내리막길이었는데, 알겠지만 모래는 구르기 때문에 나도 같이 구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다행히 미끄러울 것 같은 길이었어서 굉장히 숙여서 가고 있던 터라 넘어진 높이가 그리 높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손으로 바닥을 짚었는데 손바닥이 긁혀서 피가 났다. 피가 철철 까지는 아니고 송글송글. 그런데 그날따라 닦을 게 없어서 그냥 그 채로 마저 걸었다. 뭔가 넘어질 것 같은데,를 겪다가 드디어 넘어져서 그런지 아프고 싫다기 보다는 올 게 왔구나. 담담.
내내 덥다가 어느 순간부터 바람이 솔솔 불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덥고 습한 산행길에서 맞이하는 바람은 너무도 달콤했다. 힘듦이 씻겨가는 느낌. 루시드 폴의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라는 노랠 들으면서 걸었다. 그러다 정자를 발견해서 드러누웠는데 바람도 솔솔 불고 너무도 편안했다. 정자, 이 마룻바닥은 푹신하지도 않은데 왜 이리 편안함과 시원함을 주는지. 거기서 한참을 누워있었다. 오늘도 역시 둘레길에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정자에도 나뿐이었다. 내가 평일에 걸어서일까, 둘레길을 사람들이 안 걸어서일까. 둘레길은 참 사람이 없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을 한참 보면서 쉬다가 다시 내려갔다.
늘 느끼는 건데, 둘레길에 쓰여있는 소요시간보다 내가 늘 한참 일찍 내려온다. 내가 너무 빨리 걷는다. 내가 처음에 둘레길을 걷는다고 다짐했을 때 생각했던 건, (그땐 이렇게 모든 게 산길인지 몰랐지만) 천천히 거니면서 자연도 구경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고, 생각도 정리하고, 관찰하고 이런 걸 생각했는데 산에만 들어서면 너무 더워서 그런지, 힘들어서 그런지 폭주기관차처럼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걷는다. 그런데 그도 그럴게 멈추면 더 힘들고 멈춰봤자 덥고 벌레만 꼬이기 때문에 그곳을 빨리 지나고 싶다는 마음에 천천히 갈 수가 없다. 이렇게 빨리 가면 힘들고, 발목이나 무릎이 상할 것도 같은데.. 이제 시원해지니까 괜찮겠지, 했다. 그래서 일부로 내 앞에 누군가 걸어가면 추월하지 않고 나도 천천히 걸었다. 천천히 걷자. 급할 거 없다.
11코스의 마지막을 나서니 서울대학교가 나왔다. 여기가 서울대학교로군. 여기 지나다니는 학생들은 다 서울대생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둘레길이 끝나면 그 동네에서 점심을 먹고 노는 것까지 코스이기 때문에 이제 즐거운 고민이 시작된다. 땀은 흘렸고 이제 죄책감 없이 보상을 즐기는 시간이다. 직장동료 중에 칼국수를 좋아하는 친구의 단골 칼국수집이 근처라 일단 그곳으로 향했다. 버스를 탔는데 굉장히 동네 분들이 타는 버스였다. 내 뒷자리 중년 여성분들의 대화가 재밌다. 두 분이 함께 창밖을 보면서 수다를 나누신다. 저기 저 한식뷔페 없어졌잖어. 아 나 없어졌는지 모르고 찾아갔었다니까. 저기 저 아줌마들 좀 봐 나란히 가면서 죄다 양산을 썼네? 나란히 나란히. 이런 대화들을 즐겁게 들으며 식당으로 갔다. 그렇게 먹은 칼국수는 평범했고, 그렇게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다. 근처에 다른 친구에게 추천받은 커피집을 가서 커피를 마셨다.
ㅋㅋㅋ 정말 이곳이야 말로 자연헬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