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온 듯했던 일요일의 관악산. 둘레길 12코스.
나는 평소 주중에 둘레길을 걷는 걸 좋아하지만, 이번 주는 일정 때문에 일요일에 걷게 되었다. 이번 코스는 12코스. 지난번 서울대학교 앞에서 멈췄던 지점에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버스에 오르는 순간 분위기가 달랐다. 등산복 차림의 어르신들 사이에 끼어 있으니, 진짜 산행을 떠나는 듯했다. 잠시 후 ‘관악산 입구’라는 큰 표지판이 보였다. 입구는 사람들로 붐볐고, 노상에서는 등산모자와 장비들이 진열돼 있었다. 그곳에서 모자를 사오지 않은 것을 조금 후회했다.
본격적으로 산길을 오르니 서울을 벗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평일의 둘레길은 늘 한산했는데, 일요일의 길은 사람들로 가득해 낯설 만큼 활기찼다.
관악산은 기대 이상이었다. 산이 크지만 길은 지나치게 가파르지 않았고, 공기는 시원하고 쾌적했다. 곳곳에 숲길과 쉼터가 있어 지루하지 않았다. 이래서 다들 큰 산을 오는구나, 생각했다. 다만 전날 내린 비로 흙길은 젖어 있었고, 등산화를 준비하지 못한 탓에 발걸음이 신중해졌다. 지난주에 한 번 넘어졌던 기억도 있어 더욱 조심스러웠다.
길은 점점 돌로 가득해졌다. 나는 원래도 겁쟁이이다 안전민감증 인간이기 때문에 돌길이 특히 힘들었다. 올라가는 길은 견딜 만했지만, 내려가는 길은 금세라도 굴러 떨어질 것 같아 무릎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발목에도 통증이 번지려는 듯해 다음엔 꼭 등산화를 사야지, 하고 삼주 째 다짐했다. 초입의 인파는 사라지고, 둘레길 안쪽은 차츰 고요해졌다.
계곡과 평상이 나타날 때마다, 언제 이곳으로 모였는지 모를 사람들이 가득했다. 가족 단위의 방문객들은 자리를 잡고 아이들과 놀았고, 어르신들은 평상에 모여 음식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주로 다니는 영화관이나 카페, 바에서는 또래들만 보이는데, ‘나이가 들면 어디서 모여 시간을 보낼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다들 이렇게 산에서 모여 웃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나도 나이가 들면 이렇게 산에서 사람들과 어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 공원이 드물어 아쉬웠는데, 산이 공원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걸까.
해외여행을 가면 세련된 바나 레스토랑에도 단정한 중년, 노년의 부부이 자주 보인다. 그 모습을 보면 나도 나이 들어서 지금처럼 좋아하는 것들을 계속 즐길 수 있겠다는 안도감을 준다. 한국에서도 세대가 뒤섞여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곳이 많아지면 좋겠다. 가족이 아니더라도. 사실 요새는 공간이든 프로그램이든 젊은 층이 좋아해야 ‘잘 만든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지만, 사실은 여러 세대가 즐기는 것이야말로 진짜 좋은 것이 아닐까.
끝없는 돌길을 내려오자 석수역에 도착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뭔가 텅 빈 느낌에 의아했는데 서울과 경기의 경계에 있는 곳이었다. 오늘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카페를 찾다가 결국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잠시 쉬었다. 그날따라 유독 돈가스가 먹고 싶어 유동인구가 많은 곳으로 이동해 오래된 돈가스집에서 식사를 마친 뒤, 근처 만화방에 들러 만화책을 읽었다. 12코스 끝. 모처럼 여행온 것 같은 기분 좋았던 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