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만난 평화롭고 낯선 풍경. 광나루에서 고덕까지
지난 등산 이후, 가능하면 매주 한 번, 어렵다면 2주에 한 번은 오르자. 오르지 못하면 걷자고 다짐했다.
우면산에 오른 게 5월 중순, 지금은 벌써 마지막 주다. 딱 2주가 지났다. 지난주는 뭘 했더라. 등산은 못했다. 이번 주엔 어디든 꼭 가야 했다. 이 타이밍을 놓치면, 결국 흐지부지될 것 같았다.
서울 안에서 초보자가 오르기 좋은 산을 검색했다. 생각보다 서울에는 크고 작은 산이 많았다. "오, 재미있겠는데?" 싶다가, 이왕 하는 김에 서울 근교로? 아니, 아예 벗어나면 어떨까? 꿈은 점점 커졌다. 이나영 주연의 <박하경 여행기>처럼, 나도 휴일 중 하루쯤은 여행처럼 보내볼까? 등산에서 조금 멀어지긴 했지만, 먼 곳으로의 산책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날도 더워지고, 다짜고짜 너무 크게 시작하는 것보단 차근차근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난 등산 때 마지막에 서울둘레길로 사당까지 내려왔던 기억이 났다. '서울둘레길'을 검색해 봤다. 열 개쯤 있을 줄 알았는데, 무려 스물한 개나 있었다. 이거다. 금방 싫증 내는 나에게는 이런 체계적인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둘레길을 걸어야겠다.
어디서부터 걸을까. 1번부터 정석대로? 아니면 집 근처부터? 고민하다가, 집을 기준으로 시계 방향으로 돌기로 했다. 그렇게 한 주에 하나씩 다 돌고 마지막에 동네로 돌아오면 정말 뿌듯하겠다. 그렇게 선택한 게 6코스. 마침 초심자 코스이기도 했다. ‘한강을 따라 펼쳐지는 역사길’. 평소처럼 가방 없이 털레털레 걷고 싶었지만, 첫 도전이니 물이며 이것저것, 시집까지 챙겨서 집을 나섰다.
출발 지점은 광나루역. 시작을 알리는 표지판과 스탬프가 있다. 스탬프북도 있는 모양인데, 따로 준비해야 하는 듯했다.
시작부터 놀라웠다. 내 동네 정도는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광진교는 정말 걷기 좋게 만들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다리는 보행자 도로가 있긴 해도, 걷기 편하진 않다. 차들이 쌩쌩 달리고, 보행자는 구석에서 조심조심 걸어야 하니까. 그런데 광진교는 왕복 2차선이고, 오히려 보행자 도로가 훨씬 넓다. 작은 공원 같기도 했다. 아, 이런 다리가 있었구나.
서울에서 걸어본 다리 중에 단연 최고였다. 걷는 내내 감탄했다. 중간중간 벤치마다 NPC처럼 장년층 어르신들이 '잠시' 앉아 계신 것이 아닌 듯하게 계셨는데, 심지어 한두 번 나와본 솜씨가 아니었다. 어떤 분은 열심히 가무를 연습 중이셨다. 다음 달 '전국노래자랑' 우리 동네 편 찍는다던데, 혹시 나가시려나.
광진교는 끝까지 건너기 전에 꺾어야 한다. 오늘 처음 둘레길을 걸어보며 느낀 건, 표시가 잘되어 있긴 하지만 경로가 바뀌는 지점에서 눈에 띄는 사인은 따로 없다는 것. 멍하니 걷다 보면 엉뚱한 곳으로 가기 쉽다. 길을 꺾으면 잔디밭으로 표기된 광활한 공원이 나온다. 그 안에는 골프장처럼 보이는 공간이 있고, 많은 중장년분들이 골프를 치고 계셨다. 옆에는 ‘자전거 공원’이라는 정식 명칭의 공간이 나온다. 아이들이 자전거를 배우고 있었다. 나도 자전거 배워야 하는데.
자전거 공원을 지나고, 드론 공원을 지나면 쭉 뻗은 길이 나온다. 아래길은 가로수길, 윗길은 장미꽃길. 나는 아랫길 취향인데, 개구리 서식지라는 표시에 놀라 윗길로 올랐다. 사람들이 참 좋아할 만한 풍경이다. 장미가 한창때라 그런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길도 곧고 시원했다. 꽃길과 나무길, 모두 예뻤다. 장미 축제 따로 안 가도 되겠는걸.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다. 여기가 서울이라고?를 넘어서서 약간 유럽의 어느 숲길을 걷는 것도 같다. 나무들이 정말 크다. 별로 유명세 있는 길이 아니라서 사람도 별로 없다. 몇몇 사람들이 걷고 있다. 서로 사진도 찍어준다.
둘레길은 보행자를 위한 표시가 잘 되어 있다. 나는 산책할 때 지도를 계속 들여다봐야 하는 길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건 산책이 아니라 작업 같다. 다행히 둘레길은 꺾는 구간만 아니면 주황색 리본만 잘 따라가도 좋다. 휴대폰 없이도 충분히 걸을 수 있다. 그리고 왠지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친절히 길을 일러주는 다정함 같은 것도 느낀다. 실제로는 직장인들의 피땀눈물이겠지만..
길을 꺾어 들어가니, 여기도 서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동네가 나왔다. 암사 선사공원 쪽이다. 선사공원이 있는 줄도 몰랐지만, 갈 길이 멀어 오늘은 그냥 지나친다. 전에 연천역 갔을 때와 비슷한 풍경. 서울 같지 않은 서울이 좋다. 아직 서울에는 내가 모르는 곳이 많구나.
'노란 손수건'이 생각나는 길이다. 나무들에 묶여있는 리본들. 잠깐, 노란 손수건이 어디서 나온 거더라. 동화인가 영화인가 뭐였나. 벌써 낙엽 인간이 바스러지고 있어서 검색은 안 해봤다.
어이없게도 '이 길도 둘레길이라고?’ 싶은 구간도 나온다. 시멘트 사이에 오렌지 리본이 매달려 있다. 알고 보니 공사 중인 길이었다. 나도 직장인이어서 그런가, 서울둘레길 관리하는 거 꽤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인들, 파이팅.
여기부터 갑자기 산행이 시작된다. 고덕산이다.
여기부터는 사진이 거의 없다. 힘들었다. 얼굴이 시뻘게져서 걷고 있었다. 물론 고덕산 자체는 초보자 코스였지만, 이미 한참을 걸은 나에겐 내가 걷는 게 아니라 다리가 혼자 가는 기분이었다. 고덕산을 내려오면 코스가 거의 끝난다. 벤치에 드러누워 어디를 갈까 검색했다.
나는 어디를 가든 그 근처에 저장해 둔 ‘가보고 싶었던 곳’을 가거나, 동네 명물이라도 보거나, 하다 못해 맥줏집이라도 들러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인데, 아직 이른 시간이었고 고덕역 근처가 주거지라 그런지 마땅한 데가 없었다.
이케아 강동점. 새로 생겼다. 가자. 이미 두 시간 넘게 걷고 나서 다리는 내 것이 아니었지만, 아이스크림이 간절했다. 집에 그냥 가긴 싫었다.
이케아는 단독 매장이라기보다 입점몰 느낌이었고, 사람이 붐비진 않았다. 종류가 아주 많은 건 아니었지만, 인기 있는 품목들은 다 있었다. 나도 생각지 못하게 몇 가지 생필품을 사 왔다. 아이스크림도 참 달콤했다. 이케아 투어까지 마치고, 탈진한 몸으로 귀가했다.
앞으로의 둘레길이 기대된다. 또 어떤 내가 모르는 길로 날 인도할까. 나는 어디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둘레길은 총 스물 한 코스. 내가 한 주도 빠짐없이 한 주에 하나씩 걷게 되면 약 5개월이 걸린다. 지금은 여름인데, 둘레길을 모두 걸으면 겨울이 된다. 한 해가 간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인상도 재미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