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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만의 특권이라는 아주 '뻔한 저녁밥상' 이야기

by 미스블루

늘 차리는 밥상이지만 나에게는 '뻔한 저녁밥상' 차리기가 가장 힘든 메뉴이다.

갓 지어낸 밥에 국을 끓이고 반찬으로 나물을 무치고 두부를 부쳐 두부조림도 만들고 김치를 가지런히 썰어두고 밑반찬으로 진미채 볶음도 하고 좀 부족한 것 같아서 생선도 한토막 구워낸다.

정말 뻔하디 뻔한 저녁상이지만 손은 가장 많이 간다.

국 한 가지 끓이는 게 어디 쉬운가.. 나물무침을 하려면 씻고 데치고 적당히 양념을 하며 난리 부루스를 춰야 한다.

진미채는 또 어떤가.. 고도의 불조절이 포인트인지라 서서히 볶아내며 그 부드러움을 유지시키기 위해 자고 있던 진미채가 들을세라 숨도 속으로만 쉰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그냥 반찬 몇 가지 있는 밥이면 된다는 사람이다.

반찬 몇 가지라고라고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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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 힘든 '뻔한 저녁밥상'을 가끔 차려내는 이유는 매일 숨이 차는 일상생활을 잠시 지긋히 눌러주기 위함이다.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보잘것없지만 집밥의 위엄을 풍길수 있는 몇 가지 반찬을 만들어 내며 숨을 고른다.

그렇게 천천히 손을 움직여 몇 가지 반찬과 함께 '뻔한 저녁밥상'을 차려내면 숨차게 달려가던 시간을 잡아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너 좀 거기 서봐' 하면서 정신없이 뛰고 있는 시간의 뒷덜미를 낚아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빨리 뛰는 거냐? 하면서 천천히 좀 가자고 뒷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않기 위함이다.

슬로 푸드가 유행을 하는 것도 이래서이지 싶다.

언젠가 읽었던 미국신문기사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부자들 만이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기사였는데 다른 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이 난다.

부자들만이 천천히 집밥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고.

정말 맞는 말이지 싶다.

생계가 흔들려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해야 한다면 어떻게 골고루 음식재료를 사고 시간을 내어 천천히 음식을 해 먹을 수 있겠는가...

식사를 빨리하고 또다시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하니 패스트푸드를 먹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속하는 패스트푸드란 밖에서 파는 정크푸드도 있지만 집에서도 그냥 전자렌즈에 데우기만 하는 냉동식품도 포함이 된다.

이 신문기사를 되짚어 다시 생각해 보면 그리 부자가 아니라도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다면 그 부자들만이 할 수 있다는 일을 평범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돈이 많지는 않아도 부지런하고 여유를 찾을수 있는 사람들이 진정한 부자라는 말이 되기도 한다.


오늘은 크게 마음을 먹고 '뻔한 저녁밥상'을 차려내었다.

찬이 별로 없는 것 같은 '뻔한 저녁밥상'에 식구들이 둘러앉아 천천히 숟가락을 움직여 밥을 먹는다.

흥분할 것 없는 저녁밥상에 마주 앉은 식구들은 뜨끈한 국으로 속을 데우고 천천히 나물을 씹으며 부드러운 두부조림을 젓가락으로 잘라 입안에 쏙 넣고 오물오물 씹는다.

서로 말도 별로 없다.

이 시간은 복잡한 머릿속 생각들을 잠시 내려놓고 밥과 국과 반찬을 맞추어 먹는 일에만 신경 쓰면 된다.


결혼 전 남편과 연예를 하며 잘 가던 식당이 있었다.

해물요릿집이었는데 테이블이 있는 곳이 모두 방으로 되어있어 지금 생각해 보면 서빙하시던 분들이 아주 피곤한 곳이었다.

저 방에서 손님이 찾으면 이방에 있다가 다시 신발을 신고 나가서 저 방앞에서 다시 신발을 벗고 들어가 손님을 응대해야 했으니 얼마나 정신이 없고 힘이 들었을까?

점심시간이 되면 주위에 둘러싸여 있는 회사에서 점심을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로 그 음식점은 매일 호떡집에 불이 난듯한 형국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좋아하던 그 음식점에서 밥을 다 먹고 나가려고 보니 내 방 앞에 벗어놓은 내 신발이 없었다.

가만히 보았더니 서빙하는 언니 한분이 내 신발을 신고 이방 저 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방 앞에서 벗어던졌다가 다시 신고 저 방 앞에 가서 벗어던지고...

새로 산 내 비싼 샌들은 이방 저 방 앞에 그냥 나동그라져 있었다.

뒤축이 없는 내 신발이 신고 다니다가 벗어놓기에 딱 알맞았었는지 그분에게 당첨이 되어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서빙하시는 분이 손님 신발을 신고 뛰어다닌다는 일이...

그때는 다들 그런 일에 그렇게 유난을 떨지 않았었다.

어디 감히 손님에게!!! 이런 일이 별로 없이 손님도 직원분들도 똑같았다.

나는 그냥 '언니~~' 하고 부르고

'저 가야 되는데.. 제 신발 좀 주시겠어요?" 하니 그 언니는 아무 말 없이 재빠르게 와서 내 신발을 벗어주었고 나는 또 내 신발을 받아서 신고 나왔었다.


뻔한 저녁을 먹고 있던 남편이 생선살을 떼어먹으며 이야기를 건넨다.

'그때 그분 생각나? 당신 신발 신고 뛰어다녔던 서빙 보던 분... 생선을 먹으니 오늘은 그분이 생각이 나네

아마 그 식당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이셨던 것 같은데... 당신 신발을... 아하하하

매일 눈앞에 있는 일들에 치여서 골치가 아프다가 뻔한 저녁밥상을 앞에 두니 마음이 곱고 순둥 해져서 잘 나지도 않던 옛날일이 생각이 났는지 남편과 나는 오랜만에 아주 크게 웃었다.

부자들만이 할 수 있다는 천천히 만든 저녁 식사를 하며 웃고 있는 이 시간이 좋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내려오고 있다는 비바람 덕에 내일은 로스앤젤레스에서 귀하고 귀한 소나기를 정말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음속에 매일 내리는 소나기를 진짜로 만난다면 정말 반가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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