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자가 있다.
나이도 같고
흔하지 않은 AB라는 혈액형을 똑같이 가지고 있는..
흔하지 않은 한자가 이름 끝자리에 똑같이 있는..
서로가 어릴 적 살았던 곳에 결혼을 하고 나서 살고 있는..
마음 한구석이 늘 서러운..
그리고 한 형제의 형과 동생의 아내가 된...
나와 내동서 J 다.
J는 영화배우 같은 영어이름을 가지고 있는 미국사람이다.
어릴 적 이민을 가서 결혼을 하여 살이를 하러 한국으로 올 때까지 단 한 번도 한국에 와보지 않았던 한국인 미국사람.
J는 한국에서 결혼을 하고 어릴 적 내가 살았던 동네의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담벼락 너머에 산다.
나는 J가 이민을 와서 줄곧 살았던 엘에이에 산다.
나는 여름밤 고요한 바람에 흔들리는 달빛에 비치는 야자수를 보면 J에게 보여주고 싶고, J는 내 동네에 눈이 펑펑 오면 나에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
고국을 방문하여 동네에 들어설 때 얼마나 설레는지, 그곳에 살지 못해서 얼마나 서글픈 마음이 드는지.. 우리는 나 다음으로 그 마음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고나 할까...
J가 결혼을 하고 시댁식구들이 함께 여행을 가자며 동해안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동해안 여행의 당연한 코스인 싱싱한 회를 먹여주겠다며 시부모님은 저녁식사로 횟집을 선택하셨고, 상다리가 부러지게 나온 활어회 상차림에 식구들 모두가 신이 나서 먹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 활어회의 생선머리에 냅킨이 한 장씩 얹어져 있었다.
갓 잡은 활어의 회를 떴음을 보여주려고 횟집에서는 생선머리까지 그대로 있는 몸통에 회를 가지런히 얹어서 나오지 않는가..
눈도 입도 다 있는 생선이 자신의 저며진 살을 덮고 누워있는 모습에 미국사람인 J는 너무 놀라서 먹지도 못하고 다만 생선과의 눈 마주침이라도 피해보려고 냅킨으로 살포시 생선의 머리를 덮어 놓았던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유난 떠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회 한 점을 먹었다가 너무 싱싱해서 몇 배로 쫄깃한 식감에 더욱 몸서리를 치며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런 J가 한국에 살기 시작한 지 20년이 넘었다.
나도 J가 살던 곳에 산지 20년이 훨씬 넘었다.
J는 아주 좁은 골목길에서도 씩씩하게 운전을 잘한다.
나는 8차선의 넓은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처음 있는 학교 행사에 색깔 있는 코트를 입고 갔다가 그때부터 'ㅇㅇ 코트'라고 불리게 된 J는 이제 컬러풀한 옷들을 내려놓고 무채색의 옷들로 옷장을 채우고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걸어 다닌다.
결혼할 때 위아래로 맞춘 정장들로 옷장을 채웠던 나는 이제 치마에 커다란 앵무새가 화려하게 그려진 알록달록한 치마를 입고 샬랄라 뛰어다닌다.
올해 봄에 한국을 방문하여 J와 점심을 먹게 되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봄날에 뷰가 좋은 중국집에서 식사를 하며 향긋하고 따뜻한 차를 마셨다.
오랜만에 만나도 다정히 이어지는 J와의 나즈막한 대화.
찻주전자가 내쪽에 있어서 J의 찻잔이 비워질 때마다 차를 따라 주었더니 매번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J.
식사가 끝나고 J는 나의 다음 목적지에 바래다주겠다고 해서 J의 차를 타고 가게 되었고 지나가는 차를 보고 길을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차를 멈추고 두 손으로 공손하게 지나가라는 신호를 보내는 J를 보며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바쁜 길목에서 빨리 내려야 했기에 브레이크를 잡은 J의 손등만 살며시 잡았다 풀며 우리는 그렇게 작별인사를 했다.
J가 들려준 봉투 안에는 저온압착으로 짠 맑은 참기름과 들기름이 비행기에 싣고 가기 좋게 푹신한 뽁뽁이로 싸져 있었고 고운 분홍빛깔의 벚꽃모양 수제 초콜릿이 들어 있었다.
카톡으로 고맙다는 메세지를 보내니 '형님, 한국의 벚꽃과 함께 가세요'라는 답이 왔다.
그 떠나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서로가 갖은 마음을 다하여 서로를 보낸다.
그래서 나는 J가 내가 살던 동네에서 누구보다 행복했으면 좋겠고, 나는 J가 살던 이곳에서 행복하고 씩씩하게 잘 지내야 한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읽을 책을 사려고 공항서점에 들렀다.
그곳에서 나는 '행복할 거야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라는 책을 골랐고 비행기 안에서 책을 읽으며 J를 생각했다.
두 여자는 서로가 살아야 할 곳에서 거꾸로 살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어쩌면 서로가 살던 곳을 서로보다 더 잘 알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같고 같은 혈액형과 같은 한자를 이름에 지닌 두 여자가 저 멀리 다른 나라에서 살다가 한 형제의 아내들로 만났다.
서로가 너무나 안쓰러운 두 여자는 만날 때마다 서로를 안아준다.
그 온기가 너무 따뜻해서 잘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마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