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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신행 Oct 22. 2023

첫사랑을 잃고 ‘나’를 되찾다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해 본 적은 처음이라 사랑 뒤에 이별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큰 걸 잃어버린 후에 큰 걸 얻을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2년을 사귀는 동안 우리는 정말 많이 싸웠다. 자연스레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됐다. 어느 순간 친구들 사이에서 우리의 연애는 ‘뫼비우스의 띠'라고 불리는 연애가 되어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연애를 끝내기로 결심한 이유는 바로 ‘여자친구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대학시절 나는 ROTC 장교 후보생이었다. 학기를 마치고 방학이 오면 휴가 대신 훈련을 떠나야 했다. 4학년 하계 입영훈련을 앞두고 여자친구는 내게 물었다.


“너 훈련 가 있는 동안 나 친구들이랑 대천해수욕장 놀러가도 돼?”


대천해수욕장… 헌팅의 메카… 안 된다고 말하기도 흔쾌히 된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훈련을 떠나야 하는 군인은 힘이 없다. 나는 괜찮은 척 다녀오라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4주 동안 훈련을 받는 동안 여자친구는 친구들과 여행을 떠났다. 내가 훈련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는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대천해수욕장까지 친구 어머니가 차를 태워주셔서 편하고 재밌게 놀고 왔다고 여자친구는 말했다. 여행을 즐겁게 잘 다녀왔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여행 이후부터 여자친구의 핸드폰에 수상한 연락이 자주 왔다.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나는 곁눈질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확인한 메시지의 발신지는 바로 여자친구의 전 남자친구였다.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던 나의 상상력은 끝없이 확장되어갔다. 그래서 나는 하면 안 될 행동을 했다. 여자친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여자친구의 핸드폰을 몰래 훔쳐봤다. 발견된 대화방에는 대천 여행에 대한 진실이 숨겨져있었다. 


알고 보니 대천해수욕장까지 바래다주었다는 친구 어머니는 여자친구의 전 남자친구였고 함께 여행을 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같이 찍은 사진을 발견했을 때 살면서 처음으로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이런 감정을 ‘배신'이라고 하는구나를 처음 느꼈던 것 같다. 자리로 돌아온 여자친구에게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너의 핸드폰을 봤고 대천 여행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됐다고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너를 만날 수 없을 것 같다고. 여자친구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눈물을 흘렸고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헤어지고 6개월을 술에 빠져 살았다. 아니 사실 술이 나를 살렸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술 없이는 살 수 없었다. 맨정신에는 어떻게 하면 지금의 고통이 없어질 수 있을까를 고민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임관을 앞둔 2월 초, 나는 평소와 같이 술을 진탕 마시고 원룸 화장실 변기 앞에 쭈그려 속을 비워내고 있었다. 비워낸 토사물에서 혈흔이 발견됐다. 그때 처음으로 ‘이러다 진짜 죽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세면대 앞에 섰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 음주 후 세안을 제대로 하지 않아 생긴 여드름, 황달 증상이 보이는 눈, 누가 봐도 나는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찬물 세안 후 원룸 앞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생각해 봤다. 


과연 내가 이렇게 된 것이 이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런 모습이 이별을 하게 만들었을까? 물론 이별의 가장 큰 이유는 여자친구의 거짓말이겠지만 이것이 이별의 100% 이유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결국 이별은 서로의 잘못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내게도 잘못이 있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을 마셨고 여자친구와 친구, 선, 후배 어느 하나 포기할 수 없어서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모든 술자리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건설적인 대화란 불가능한 남자친구였다. 그때마다 여자친구는 내게 항상 말했다.


“신행아, 건강 챙겨, 너 진짜 눈동자 색이 변했어… 술 좀 그만 마셔. 전역 후에 취업을 위해서 자격증 공부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여자친구의 걱정에 나는 말했다.

“군대에서 장기복무하면 돼, 지금은 군대 가기 전까지 놀아야 할 때야.” 


안타깝지만 그 당시 나의 생각은 딱 거기까지였다. 노력 없이도 인생은 알아서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철없는 20대였다. 내가 바뀌지 않았다면 이별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이별이라는 큰 파도는 변하지 않을 바위 같았던 철 없는 20대의 생각을 천천히 가다듬게 했다. 나중에 읽게 된 알베르 카뮈의 문장을 통해 나는 이 당시의 나의 상황을 이해하게 됐다.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을 맞이한다면 그건 뭔가를 얻었을 때가 아니라 잃었을 때일 것이다"


24살, 나는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잃었고 비로소 나는 ‘나’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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