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꺼이 사라진다
프로 대필 작가에게 익명은 숙명이자 전략이다. 우리는 이름 없이 문장을 설계하고, 흔적 없이 서사를 구성한다. 표지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책을 구성하는 언어의 골격과 뼈대는 대필 작가의 손끝에서 태어난다. 익명성은, 문장의 정체성을 온전히 고객에게 귀속시키기 위한 고도의 기술이자 철학이다. 나를 지우는 일은, 곧 문장을 살리는 일이다.
문장을 대신 쓴다는 건 고객의 삶, 어조, 감정 구조를 파악하고, 거기에 나의 문장력을 입히는 정교한 작업이다. 이때 작가는 철저하게 2선으로 물러나야 한다. 나의 문장 습관, 나의 시선, 나의 논리를 억제한 채, 고객의 언어 구조를 파악하고 그 리듬에 맞게 재배열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수십 시간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억양과 말버릇, 비문과 침묵까지 기록한다. 표면에 드러난 말보다 말의 뒤편에 감춰진 감정의 구조를 포착하는 것이 이 작업의 핵심이다.
이름을 지운다는 건 ‘무(無)’가 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더 치열하게 존재해야 한다. 작가의 존재가 사라진 문장은 공허하다. 익명성 뒤에 숨는 것이 아니라, 익명성 뒤에서 더욱 날카롭게 판단하고 조율해야 한다. 글쓴이로서의 자의식을 지우되, 글을 완성하는 장인으로서의 자기 통제는 극대화된다. 문장이 고객의 것이 되어야 하기에, 내 이름은 표지에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 글의 완성도를 위해서, 나는 모든 능력을 동원한다. 그 아이러니 속에서 프로 대필 작가는 존재한다. 시장에서 익명의 작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능한다. 어떤 이는 유튜버의 자서전을 쓴다. 또 다른 이는 대기업 임원의 에세이를 구성한다. 유명인의 삶을 정리하는 데 특화된 사람도 있고, 스토리텔링형 자기계발서를 설계하는 작가도 있다. 어떤 프로젝트는 철저히 기록형이고, 어떤 경우는 서사의 리드가 필요하다. 대필 작가는 매번 다른 인물의 삶을 연기하고, 다른 장르의 논리를 설계하며, 때로는 한 권의 책 속에서 수십 개의 감정을 통역한다. 그 모든 작업은 내 이름 없이 수행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이 무명의 글이, 누군가의 삶을 바꾸고, 누군가의 이름이 되는 순간을.
익명성은 무책임함과 다르다. 오히려 반대다. 얼굴 없는 노동은, 더더욱 결과로 말해야 한다. 내가 쓴 책이 좋은 책이어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서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출판사보다 먼저 퇴고하고, 고객보다 먼저 검열하며, 독자보다 먼저 감동을 준비한다. 이름이 없기에, 문장은 더 완벽해야 한다. 얼굴이 없기에, 책은 더 선명해야 한다. 내 이름은 지워져도, 책의 완성도는 그 무엇보다 분명해야 한다.
나는 누군가의 책 속에서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 속에 없다. 이 역설은 외롭지만, 외롭지 않다. 그 문장을 읽은 독자가, 그 글을 통해 삶을 위로받았다면, 그건 내 이름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으로 충분한 것이다. 나의 존재는 사라졌으나, 누군가의 삶은 문장 속에서 더욱 명확해졌다. 그것으로 족하다. 이름 없는 삶, 그러나 책임은 가장 분명한 자리. 그 경계 위에 나는 선다. 그리고 오늘도 조용히 한 권의 책을 완성한다. 내 이름을 지운 채, 누군가의 진짜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대필 작가가 직업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 사라지는 능력 때문이다. 그 사라짐은 무기력한 포기가 아니라, 능동적인 자기 비움이다. 사라진다는 건 곧 드러내지 않는 것, 그러나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떠안는 일이다. 이름 없이 살아가는 글쓰기, 그것은 단순한 익명이 아니라, 익명 너머의 정체성을 다루는 일이다. 나는 그 사라짐 속에서 더 분명하게 존재하는 법을 배워왔다.
이 직업은 특성상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계약서에는 이름이 남지만, 출판물에는 기록되지 않는다.아니, 기록이 되어선 안된다. 어떤 작가는 그 이름이 드러나는 순간 직업적 경계가 무너진다고 믿고, 어떤 의뢰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철저하게 익명을 고수한다. 나 역시 그런 요청에 익숙하다. 그것이 이 일의 룰이자 품격이기도 하다. 이름을 지운다는 건, 결국 글을 전면에 세우겠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저자 뒤에 숨는 글의 복화술사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이야기는 종종 그 뒤에 숨어 있다. 어떤 원고는 말로 꺼내지 못한 슬픔을 담고 있고, 어떤 글은 오래 감춰둔 후회를 품고 있다. 의뢰인은 말한다. "이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건데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그 사람의 삶을 대신 지닌 자가 된다. 그 신뢰는 작가로서 가장 무거운 책임이자, 가장 깊은 자극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라질수록 더 정직해진다.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단어를 윤색하지 않으며, 오로지 그 삶의 밀도만을 지켜낸다.
사라진다는 건 익명의 그림자가 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서사 속에 더 깊숙이 스며드는 일이다. 누군가의 문장을 대신 완성하기 위해, 그 사람보다 먼저 아파보고, 그 사람보다 더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그게 가능할까? 가능하다. 그것이 우리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장 속에, 단락의 흐름 속에, 장 전체의 구조 속에 우리의 손을 넣는다. 그러나 그 손은 절대 앞에 나서지 않는다. 구조의 미학, 감정의 층위, 문체의 호흡까지 조율하면서도, 자신의 존재는 투명하게 만든다. 이 투명함이야말로 진짜 대필 작가의 윤리이자 자부심이다.
익명은 때로 무거운 침묵이 된다. 세상은 보여지는 성과를 원하고, 누가 썼는지를 묻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더 좋은 문장으로 답할 뿐이다. 언젠가 한 고객이 내게 말했다. "이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어요. 그런데 나는 이렇게 못 썼을 거예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알았다. 그것이야말로 이 직업의 존재 이유라는 것을. 이름은 남지 않지만, 누군가의 말이 완성되었다는 실감.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그러나 이 사라짐은 때때로 우리를 시험한다. 자존감이 흔들리고, 때론 헛헛하다. 내가 쓴 글인데, 누군가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가고, 그 사람은 그 글로 존경을 받는다. 그런 순간, 작가는 묻는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대답해본다. "나는 문장에 있다." 나의 윤리는 내가 쓴 문장이 진심이라는 데 있고, 나의 긍지는 그 진심을 이름 없이 지켜냈다는 데 있다.
대필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끝없이 사라지는 연습을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사라짐은 결코 공허하지 않다. 오히려 그 사라짐 덕분에 더 많은 이들의 삶이 기록되고, 더 많은 목소리가 드러난다. 나는 오늘도 한 사람의 삶을 통째로 받아 적는다. 이름은 없지만, 문장이 살아 있고, 그 문장 속에서 누군가는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꺼이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