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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필 작가다. 9

문체를 재현하는 기술 – 말에서 글로, 사람에서 문장으로

by 김선희

문체를 재현하는 기술 – 말에서 글로, 사람에서 문장으로


대필 작가의 일은 한 사람의 존재 전체를, 그 말투와 감정, 살아온 결을 문장이라는 새로운 형식 안에 조형해내는 일이다. 나는 단어를 고르기 전에 그의 눈빛을 기억하고, 문장을 엮기 전에 말을 멈추던 침묵의 결을 먼저 떠올린다. 말은 곧 사람이다. 그 사람이 지나온 시간과 세계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언어의 층위를 나는 조심스럽게 읽고, 풀고, 다시 써 내려간다.


겉으로 드러나는 말에는 정보가 담겨 있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말하지 못한 사정, 감정의 진동, 무의식적인 호흡이 있다. 나는 인터뷰를 할 때, 단지 말의 내용만을 받아적지 않는다. 상대가 말하다 멈칫한 순간, 뜻밖에 목소리가 낮아진 타이밍, 고개를 돌리며 애써 삼킨 눈물까지 기억한다. 녹취기에는 남지 않는, 종이 위로 옮겨지지 않는 그 모든 장면이 나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문장의 재료다. 언어가 아닌 것들로부터 언어를 구성하는 일, 그것이 바로 대필 작가의 기본이다.


대필이 어려운 이유는 사람마다 말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문장의 끝을 흐리며 말하고, 또 다른 이는 또렷하게 마침표를 찍는다. 누군가는 요점을 먼저 꺼내놓고 감정을 덧붙이며 설명하지만, 어떤 이는 감정을 길게 늘어뜨린 뒤 조심스럽게 본론에 닿는다. 나는 말의 리듬을 파악하고, 그 구조를 글 속에 재현해낸다. 이 재현은 단순한 흉내가 아니다. 공감과 해석을 넘어서, 결국은 그 사람의 세계관을 내 안에 들여놓는 일이다. 나는 그 골격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문장을 짓는다. 앞서도 말했듯이 인터뷰 녹취는 나에게 지도와 같다. 전체 녹취를 정리한 후 주요 문장을 골라내고, 반복되는 패턴, 선호하는 단어, 문장의 리듬, 쉼표의 위치, 망설임의 종류를 구분한다. 웃음이 자주 나오는 주제, 침묵이 길어지는 지점, 감정이 부풀어 오르는 단어들을 찾아내고 표로 정리해둔다. 나는 그것을 '문체 프로파일'이라 부른다. 배우가 특정 인물의 걸음걸이, 손짓, 말투를 연구하듯이, 나는 문장을 쓰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렇게 하나의 문체를 입고 벗으며, 나는 점점 그의 호흡을 따라간다.


문체는 단지 어휘의 문제가 아니다. 억양, 표정, 말의 속도, 단어의 사용 빈도, 그리고 말하지 않은 것까지도 문체의 일부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던 장면은 “마치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이”라는 표현으로 살아나고, 긴 침묵 끝에 꺼낸 말은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으로 번역된다. 말은 물리적으로는 사라지지만, 그 흔적은 문장의 리듬으로 남는다. 대필 작가는 그 흔적을 감지하고, 가만히 따라가며, 보이지 않는 것을 글로 보이게 만드는 번역자의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관성이다. 사람의 말은 상황과 감정에 따라 변한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다른 날, 다른 감정으로 전혀 다른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나는 그 모든 말들 속에서 공통된 감정의 뿌리, 세계를 바라보는 중심 축을 찾아야 한다. “이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가?”, “이 사람이 고른 단어는 왜 하필 그것이었는가?” 그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문체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이 일관성을 지켜주는 것이야말로, 이 직업에서 가장 중요한 충실함이라고 믿는다.


나는 지금도 누군가의 말투를 입은 채 글을 쓰고 있다. 그 말투는 화자의 삶의 방식이고, 생각의 구조이며, 감정의 질감이다. 말은 곧 존재이고, 존재는 결국 문장이 된다. 나는 오늘도 말과 말 사이의 틈에서 사람을 읽는다. 그 사람을 닮은 문장을 한 줄 한 줄 써 내려가며, 보이지 않는 얼굴을, 보이는 글로 다시 살아나게 한다.




말은 다르지만, 삶은 같다 – 감정의 편집과 삶의 통합


사람들은 각자의 말투와 문장이 다르고, 감정의 표현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그 밑바탕에는 비슷한 갈망이 있다.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온전히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 말은 다르지만 삶은 같다, 라는 이 단순한 명제를 나는 대필 작업을 하며 매번 다시 깨닫는다.


그래서 고객의 언어는 언제나 단일하지 않다. 사람은 하루에도 열두 번 마음이 바뀌고, 감정의 크기와 색조는 인터뷰 시간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어떤 날은 분노로 가득했던 이야기가, 다음 날에는 슬픔이나 허무로 채색된다. 대필 작가는 그 모든 감정의 결을 수집하고 편집하여 하나의 맥락 속에 담아야 한다. 감정의 진폭을 억누르지 않으면서도, 그 파동이 독자에게 닿을 수 있도록 조율하는 일. 그것이 바로 감정 편집의 기술이다.


감정은 서사의 방향을 바꾼다. 똑같은 사건도 '분노'의 시선으로 쓰이면 투쟁의 이야기가 되고, '연민'의 시선으로 쓰이면 용서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나는 인터뷰에서 고객이 특정 사건을 어떤 감정으로 바라보는지 유심히 관찰한다.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을 바라보는 감정의 구조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글은 정보가 아니라 시선으로 쓰는 것이라는 믿음이 나에게는 있다. 때로는 감정을 선택해야 할 때도 있다. 고객의 말 속에는 서로 상충되는 감정들이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부모에 대한 원망과 감사가 동시에 존재하거나, 실패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부심이 교차할 때가 있다. 나는 그 감정들 사이의 줄다리기를 그대로 보여주기보다는, 그것을 하나의 흐름으로 녹여낸다. 이는 단순한 축소가 아니라 통합이다. 대필 작가가 감정을 편집한다는 것은 감정을 지우거나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조각들을 조율해 서사의 균형을 잡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내 감정과도 싸운다. 고객의 말을 들으며 때로는 울컥하고, 때로는 나의 가치관과 사상에 맞지 않아 불편하거나 혼란스럽다. 하지만 나는 그 감정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나의 감정은 문장을 쓰는 데에 도움이 되지만, 글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필 작가는 자기 감정을 적절한 거리에서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고객의 삶에 몰입하되, 어느 순간에는 한 발짝 물러나 객관의 자리에 서야 한다. 그것이 이 직업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중요한 균형이다.


나는 종종 한 사람의 말 속에서 또 다른 사람의 삶을 본다. 언뜻 보기엔 전혀 다른 말들 속에서도 반복되는 패턴이 있고, 공통된 정서가 있다. 인간의 경험은 다르지만, 감정의 구조는 묘하게 닮아 있다. 그래서 대필 작가는 한 사람의 삶을 쓰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인 무언가를 건드리게 된다. 그것이 이 작업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든다. 결국, 나는 누군가의 삶을 구성하는 언어를 빌려, 또 다른 독자의 삶에 닿을 문장을 쓴다. 글이란 다리를 놓는 일이다. 그 다리를 건너는 사람은 말이 아닌 감정으로 건넌다. 나는 그 감정이 안전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글의 바닥을 다지고, 리듬을 조율하며, 침묵의 틈마저도 문장으로 메운다.


말은 다르지만, 삶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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