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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찌 Jun 08. 2024

지금의 나를 만든 경험의 시작

처음으로 컴포트 존을 벗어나 다른 세계와 접촉한 곳은 독일어를 배우게 된 어학원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다들 다양한 이력을 가지고 두세 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모습을 보며 놀랐다. 한국에서 나름대로 다양한 문화 경험을 해봤다고 자부했지만, 이곳에서는 그저 변방에서 온 평범한 한국인일 뿐이었다.



미국, 캐나다, 스페인 등에서 온 친구들과 어떻게 독일에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친구는 나나코였다. 나나코의 부모님은 일찍이 캐나다로 이민 가서 나나코와 여동생, 남동생을 낳았다. 당연히  나나코는 부모님의 언어인 일본어를 구사하며, 캐나다에서 태어나고 자라 영어도 모국어로 구사했다. 게다가 나나코는 어릴 적부터  플라멩코를 배워 스페인 문화가 그녀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의  완벽한 스페인어도 구사했다. 그녀는 캐나다에서 마케팅 관련 일을 하면서 동시에 플라멩코 댄서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독일에  오게 된 이유가 유럽에서 다양한 워크숍을 진행하고 공연을 하기 위해서라니! 나는 이렇게 다양한 문화 배경을 가진 사람은 처음  보았다.



브렌트라는 키가 2미터 남짓 되는 미국인 아저씨는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던 중 박사 과정의 독일인 부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부인을 따라 독일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했다. 스페인에서 온 마리나라는 친구는 베를린이 힙하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오게 되었으며, 잘생긴 스테판이라는 캐나다 친구는 여행을 좋아해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베를린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했다. 브라질에서 온 깜찍한 19살 소녀는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이혼하여 브라질에서 어머니와 고등학교까지 살다가 성인이  되어 아버지와 살아보고 싶어 베를린으로 넘어왔다고 했다. 베를린에 있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브라질 레스토랑 겸 바에서 알바를 하며  베를린 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사람은 볼리비아에서 온 라틴 언니 메를린이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섹시한 외모의 그녀는 일본에서 일본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고 18년간 살다가 이혼하고, 일본에서 만난 15살 어린 라틴계 독일인  의사 남편을 만나 전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딸 3명을 데리고 베를린으로 이주해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저 독일어를  미친 듯이 배워서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독일에 왔던 터라, 우리 반 학생들의 다양한 독일 입성기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2011년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내 주변에는 이혼한 사람도 없고, 3개 국어를 하는 사람도 없으며, 패치워크 패밀리로 쿨하게 사는  가족도 없고, 해외에서 외국인과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 돈 주고도  못하는 세상 사는 이야기가 너무 신기했다.


13년이 지난 지금, 나는 플라멩코를 추던 나나코처럼 살사 공연을 하러  이탈리아, 프랑스, 폴란드 등 유럽 도시를 돌며 공연도 했고, 어쩌다 보니 3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  토종의 색을 지니고 있던 나는 현재 다양한 인종이 총집합된 난민 구조 단체에서 6년째 근무하고 있으며, 지난 10년 동안  아일랜드, 영국 남자친구와 연애했고, 쿠바를 방문해 거기서 만난 9살 연하 쿠바남자와 장거리 연애도 해봤다. 그리고 지금 2024년 나는 독일인과 결혼해 아직까지 베를린에 살고 있다. 아마도 베를린에 오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경험은 상상 속에서도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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