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미국에 온 직후 5개월 동안 메이저리그를 쳐다도 안 봤던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비싸고, 응원 문화가 재미없어 보였으며, 무엇보다 평생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던 리그였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메이저리그는 KBO리그와 비교했을 때 티켓 값이 훨씬 비싸다. 한국에서는 제아무리 돈 없는 학생이라 할지라도 프랜차이즈 카페 커피 두 잔만 안 마시면 넉넉하게 야구장 나들이를 다녀올 수 있다(스타벅스 카페라테 Tall 사이즈 5000원, 잠실 야구장 주중 외야석 가격 성인 기준 8000원, 종합운동장역 6번 출구 앞 노점상 할머니 김밥 한 줄 1~2000원). 황규인 <동아일보> 스포츠부 기자의 포스팅에 따르면 2019년 기준 MLB의 평균 티켓 가격은 4만 원이었다. 중계방송의 경우, 첫째로 우리 집은 케이블TV를 가입하지 않았고, 둘째로 MLB.tv의 연간 구독권이 130달러였기 때문에 냉큼 결제할 생각도 안 들었다.
치어리더와 응원 단장의 주도하에 신나게 응원가를 부르짖지도 않는 야구장에 티켓 값 내가며 가고 싶지도 않았다. 당시의 내게 메이저리그란 '펑퍼짐한 중년 백인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조용히 경기를 보다가 타자가 배트 플립 한 번 하면 "저, 저,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하고 혀나 차는' 수준 높고 보수적인 성향의 리그라는 인식이 강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키는 응원 문화를 기대하며 잠실구장에 찾아온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얼굴이 구겨지든 말든 목이 나가도록 "이정후 홈러어어어언!!!!!!!!!!!!"을 부르짖던 10년 차 KBO리그 팬으로서, 그런 숨 막히는 응원 문화에 적응할 자신이 없었다.
메이저리그 직관에 뜻이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2022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위 문단 같은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을 정도로 MLB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이 박찬호의 뒤를 잇는 한국 최고의 투수로서 이름을 떨치든, 지금은 프로야구 팬들 사이에서 볼드모트 같은 존재가 된 강정호가 홈런을 뻥뻥 치며 피츠버그의 영웅으로 거듭나든, 단 한 번도 제대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KBO리그 보기에도 바쁜데 새벽 일찍 일어나 메이저리그를 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작년 내내 머무르던 곳은 한국이 아닌 미국이었고, 지난 10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열정적으로 KBO리그를 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오늘 경기는 어떻게 진행될지 설레는 마음과 함께 생중계를 시청하던 평일 오후 6시 30분은, 미주리주에서는 한창 꿈나라로 떠나 있을 시간인 오전 3시 30분이었다(썸머 타임 시기에는 오전 4시 30분). 도저히 평일 경기를 챙겨볼 수 없었다. 이곳 기준으로 오후 11시에서 오전 2시에 경기가 시작되는 주말 게임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실 어쩌다가 그 시간까지 깨어 있어서 경기를 보게 된다 하더라도 문제 투성이었다. 인터넷 중계방송을 지원하는 네이버와 카카오TV 둘 다 해외 아이피 접속을 차단하는 데다가, 이곳의 인터넷 속도가 한국에 비해 많이 느린 탓에 VPN으로 우회하려 하면 버퍼링 지옥과 함께 저화질 중계를 봐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지난 한 해를 통틀어서 유일하게 KBO리그 경기를 생방송으로 시청했던 시기는 키움 히어로즈의 창단 세 번째 한국시리즈가 진행되던 10월뿐이었다. 이때는 '키움의 역사적인 첫 우승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라는 김칫국에 뇌가 절여져서, 매일 새벽 3시마다 경기 시작 전 냉수 기도를 올린 뒤 허벅지를 꼬집어 졸음을 쫓아가며 생중계를 봤다. 당연하지만 이 시기는 2022년 한 해 중 가장 생체 리듬이 박살 났던 시기이기도 했다.
강산이 한 번 바뀌고도 남을 시간을 오롯이 '야덕질'에 투자한 삶이었다. 그런데 바다 건너 낯선 땅에 온 탓에 정상적인 '야덕질'이 불가능했다. KBO리그 대신 MLB라도 봐야만 갈증이 해소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나라의 프로야구는 직관도 집관도 '메알못'이 성큼 지불하기에는 너무 많은 돈을 요구했다. 한참을 그러한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맷 홀리데이 명예의 전상 입성 기념 티켓 세일 광고를 발견했다. 평소 30~45달러에 판매하던 Field Box 석을 17달러에, 20달러짜리 Large/Pavilion 석을 7달러에 판매하는 무시무시한 폭탄 세일이었다. 이 정도 금액이라면 한 번쯤 가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반년간의 미국 프로야구 정복기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