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소환
"음- 수박 냄새 같아!"
"응? 진짜? 너도 그래? 와!"
교문을 코 앞에 두고 등교하는 아이들 틈에서 나는 흥분해서 목소리가 커졌다.
" 신난다! 나 며칠 전 이런 날씨에 친구들한테 그 말 똑같이 했는데 아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거든!
그런데 네가 나랑 똑같은 말을 하네. 너무 신기하다! 그치, 딱 수박 냄새지? 역시 내 딸! "
정말 신나서 신나는 아무 말로 호들갑을 떨었고 열 살 딸아이는 그렇게 좋아하는 엄마가 또 기분 좋아서
" 어, 이거 수박 냄새 맞는데. "
하며 씨익, 웃었다.
덕분에 교문 앞에서 평소에는 잘 들을 수 없는 '사랑해'를 들으며 헤어질 수 있었다.
미리 노트북을 켜고 커피를 주문해 두었던 카페로 돌아오면서도 그게 뭐라고 마음이 설렜다.
열흘쯤 됐으려나.
<방금 커피 사서 한 바퀴 돌고 왔는데 아침 공기에서 싱싱한 수박 냄새 나. 갑자기 수박 먹고 싶네. ㅋ>
나의 이 메시지에 반응을 보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매캐한 연기 냄새라면 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표현은 늘 공감하는 이가 있었으니까.
내가 다시 내 감성을 글로 적고 들여다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한때, 너무 싫어했다. 일기를 메모처럼 썼다. 그런 남의 글도 외면했다. 당연히 이후에 만난 친구들은 내가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지, 지금 이런 공간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올해 들어 부쩍 나는 많이 어렸던 시절의 나로 자꾸만 돌아가고 있는 걸 느낀다. 붙일 수 있는 원인은 꽤 된다. 코로나 블루, 갱년기, 공황장애와 우울증. 더하여 최근에 시작된 계절 증후군!
자꾸만 울컥이는 순간이 잦아진다. 일탈을 슬쩍 꿈꾸는 내가 우습다. 곧... 무서워질는지도 모른다!
열 살 딸아이의 수박 냄새 표현에 이렇게 흥분하고 어쩔 줄을 모르게 행복해하다가 이 아이가 내게 왔던 십 년 전의 추억이 떠올랐다.
이 아이가 내게 찾아오자마자 너무 고팠던 것이 딱 두 가지가 있었다.
'그림'이 너무 보러 다니고 싶었고,
경주 '석굴암 본존불상'이 그렇게나 보고 싶었다.
남편은 별로 호응해 주지 않았지만 나는 정말 괴로운 입덧에 아무것도 먹을 수 없어도 그것이 너무 고팠기 때문에 둘 다 추진했다.
11월, 경주 불국사에 늦은 오후에서야 도착했다.
남편은 그런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무척이나 피곤한 얼굴이어서 나는 그냥 혼자 가겠다고 했다. 주차장에서 잠이나 자고 있으라고.
해가 저물고 있는 산길을 혼자 걸어 들어가 마주했던 본존불상, 그 감동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다시 걸어 나오는 길에 산비탈을 부스럭거리던 사슴을 마주쳤던 멋진 순간도.
그 길을 무거운 몸 때문에 발톱이 빠지는 줄도 모르고 걸으며, 내 몸 안의 이 아이가 다른 것은 몰라도 나랑 감성, 취향은 비슷했으면 좋겠다고 바랐었다.
그래서 같은 책을 이야기하고, 이런 길을 같이 걷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아직 그만큼은 아닌데도 요즘 감성이 정상이 아닌 나는, 수박 냄새 한방에 십 년 전의 바람까지도 꺼내 들고 앉았다.
갱년기 시작, 맞나 보다.
차갑고 신선한 가을 아침이 너무 짧을 거 같아 벌써 아쉽다.
나는 오늘도 종일 생각이 많을 것 같다.
#가을증후군#어떤일탈을#꿈꾸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