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조선 #세종 #울주 #해적 #울산 #왜인 #이예 #통신사
10월 어느 날이었다. 나는 울산의 한 호텔방에서 어떤 남자와 통화를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K대학 교수로 있다가 은퇴했다.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접근하는 것이고 그처럼 공식적인 직함이 없기 때문이다. 엄지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가 앞니로 지그시 물었다. 머릿속으로 할 얘기를 정리 했다. '어디에서 온 누구이다. 역사 공부를 하고 있는데 세종실록을 읽다가 '이예' 선생을 알게 됐다. 그분에 관한 글을 쓰고 싶어서 울산에 답사를 왔다. 직계 후손이라고 들었는데 한번 만나 볼 수 있을까? ' 뜸을 들이다 번호를 눌렀다.
객실에 비치된 회색빛 부직포 실내화로 시선이 갔다. 그는 자신의 선조를 언급하자 경계를 풀었다. 다음날 호텔 로비에서 만나기로 하고 소독제 냄새가 자욱한 침대에 누웠다.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영화 나니아 연대기의 주인공이 낡은 옷장을 통해 겨울이 지속되는 세상으로 들어간다. 내게도 그런게 있다. 지난 몇 년간 코로나 팬더믹으로 일이 끊겨 각종 공과금과 국세, 관리비 등이 밀렸다. 보조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급한 것부터 봉했다. 돈은 없지만 시간이 생겼다. 소설속 주인공처럼 매일 6층짜리 건물 높이 분량의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며 과거를 들락거렸다. 해적이 노략질을 하고 백성을 구출해 오는 딴 세상 같은 기록을 읽으며 일상의 걱정과 근심을 회피했다.
울산까지 오게 된 그날의 기록은 '세종실록 1445년 2월 23일자' 기사였다. 미천한 신분의 청년이 벼슬길에 올라 '해적'을 소탕한 사연이었다. 기사에 의하면,
'이예'가 울산군 아전으로 있던 '홍무 병자년 12월'은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지 5년이 되던 해이다. 그의 나이 스무살때다. 경상도 영해 '축산' 앞바다에 3천명의 무장한 왜적들이 배 60여척을 끌고 나타났다. 그들은 '조선의 백성이 되게 해달라'고 망명을 청했다. 역대급으로 큰 규모의 '무장 군사 귀화 사건'이다. 당시 울산의 수령 '이은'이 그들을 접대했다.
조정에서 차일피일 결정을 망설이는 사이 동래의 어느 승려가 왜적에게 이르길,
관군이 쳐들어온다는 말에 우두머리 '비구로고'는 크게 노했다. 3천명의 망명객이 적군으로 돌변해 관청을 습격하고 가옥을 불살랐다. 곡식과 재물을 약탈해 배에 실고 수령 '이은'과 기생, 관리 7명을 인질로 삼고 바다로 도망쳤다. 이때 다른 아전들은 도망갔는데 '이예'는 관청의 은그릇을 챙겨 왜적의 배 뒷 행미에 붙어 뒤쫓아 갔다.
며칠뒤 바다를 항해하던 왜적들이 그들 본거지에 도착하자 잡혀간 수령 이은과 관료들은 배를 구해 탈출 계획을 세우며 틈을 엿보고 있었다. 때마침 나라에서 통신사 박인귀를 보내 왜적들과 교섭을 하고 잡혀간 관료들을 귀환시켰다. 이때 왜적을 뒤쫓아간 '이예'의 공을 높이사 아전의 향역을 면제받고 벼슬길에 오른다.
그는 벼슬길에 올라 통신사를 따라 왜의 나라에 갔을때 집집마다 문을 열어 '어머니'를 애타게 찾았다. 그의 나이 8살때 어머니가 왜적의 포로가 되어 생이별을 했기 때문이다. 그가 일흔셋의 나이로 눈을 감기 전까지 험한 바닷길을 누비며 노예로 잡혀가 구출해온 백성들이 무릇 500여 명에 이른다.
그는 나라가 패망해 주권이 일제에 넘어가기 몇 달 전 대한제국이 그에게 '충숙공'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600억의 재산을 독립운동에 모두 바친 사람들도 못 받은 시호를 어떻게 받게 됐을까? 500년전에 죽은 사람을 불러낸 배경이 궁금했다.
다음날 커피숍에서 그를 기다렸다. 평일 오전은 한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K인증 마스크를 쓴 남성이 색이 바랜 갈색 가죽 가방을 들고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들어왔다. 그가 이예 선생의 '직계후손'이구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느린 걸음으로 차분하게 맞은편에 앉았다. '코로나 때문에...'라며 말 끝을 흐리고 마스크를 벗었다. 성근 은회색 머리카락으로 시선이 갔다.
15세기 바다를 누빈 조선 관료를 21세기 커피향이 가득한 호텔 커피숍에서 조우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모습에서 실록에서 만났던 이예 선생의 체형과 생김새를 유추했다. 검게 그을렸고 바다내음이 났을 것이다. 그는 표정 변화가 없는 성실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준비해온 여러가지 자료를 테이블 위에 꺼냈다. 석유 냄새가 잦아든 오래된 지역 신문과 소설책, 자료집들을 과할 정도로 가져왔다. 그중 일본에서 출판한 저작물이 눈에 띄었다. 소설과 다큐멘터리 영화도 있었다.
답을 듣기도 전에 왜 일본이 그에게 관심을 가졌지? 의구심과 거부감마저 들었다. 통신사였던 이예 선생을 통해 조선과 일본이 대등한 위치에서 외교를 한 인물로 부각시켰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초동의 국립외교원 앞마당에는 이예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울산에는 그의 이름을 딴 '이예로'라는 도로명도 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민망한 속내를 드러냈다.
귀화한 왜인이란 '조선으로 이민 온 외국인'이다. 그당시 미천한 신분으로 봤다. 질문이 불쾌 했을까,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을 지적했다.
나랏일을 하던 고위직 아버지의 자식이 어쩌다 왜인으로 귀화했을까? 그의 후손들은 모두 왜에서 나고 살았을까? 조선에 귀화했든, 왜로 귀화했든 '왜인'과의 연관성은 어쩔 수 없었다.
역사 공부를 하고 답사를 다니면서 꽤 유명한 명문가 집안의 독립운동 자손들을 만났다. 누구는 나라판 대가로 돈을 받고 누구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자식들은 거리의 부랑아로 살다가 굶어 죽기도 했다. 선조들의 역사는 내 의지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와 나는 동시대를 살면서 나라를 구한 것도 판 것도 아니다.
그의 카톡 프로필에 있는 문구가 복잡한 심경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와 헤어지고 울산을 답사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어렴풋이 고등학교때 현대 중공업 공장에 수학여행을 간 기억이 났다. 고철 냄새와 굉음이 나던 철 계단을 걸으며 부품들이 만들어지고 조립되는 제국의 위엄에 움츠러 들었다.
오후 네시경, 현대 조선소 앞 도로에 백여대가 넘는 오토바이가 똑같은 포즈를 하고 신호에 대기하고 있었다.
초록색 신호를 받은 스쿠터가 부앙거리며 떼지어 달려갔다. 어느집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들이겠지. 조선소 담벼락은 하늘을 덮을 기세로 높았다. 마치 하늘에서 우주선을 고치는 크레인 모양의 팔들이 유영하듯 느리게 허우적 거렸다.
울산 시민들이 자주 찾는 대왕암 공원을 갔다. 서늘한 동해 바다 푸른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작은 배 한척이 자기 몸짓보다 열배나 큰 유조선을 끌고 거북이처럼 가고 있었다. 이곳은 어디일까. 이예 선생의 행적을 쫓다가 '조선총독부 직인이 찍힌 울산군 지도'를 한국사데이타 베이스 사이트에서 발견했다. 그 지도는 울산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나는 1600년대에 제작된 이 지도를 보면서 '구글 지도'를 통해 닮은 곳을 찾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날 흡사하게 닮은 곳을 찾았다. 내가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찾으려 했던 이유는 어떤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들은 말 때문이었다.
광복회 학술원장으로 재직중인 김병기 박사는 만주 답사를 가면서 알게 됐다. 그분의 증조할아버지 '희산 김승학 선생'은 유명한 독립운동가 이시다. 그분이 할아버지께 들은 이야기는 '우리는 대륙에 살았다'는 것이다. 대륙? 처음에 그말을 듣고 103세에 돌아가신 나의 증조할머니가 '만주에서 비단 장사'를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희산 김승학 선생'은 임시정부 때 참의부 참의장을 지낸 분이시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 잡혀서 허벅지 뼈가 으스러지는 고문을 수차례 당한 분이다.
며칠동안 유럽, 아시아, 호주, 북미, 남미 해안가를 뒤졌다. 가장 비슷한 그곳은 버지니아 동부 해안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