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소정 Apr 06. 2018

나는 시어머니의 친정식구이고 싶다.


비 오는 아침, 오전 요가 수업을 마치고 서둘러 요가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내비게이션에 OO수목장을 목적지로 설정하고 차에 시동을 켠다. 컴컴한 지하 주차장을 뱅글 돌아 나오니 봄의 세상이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영화음악 방송이 나오는 시간이다. 라디오의 볼륨을 높이고 빗길을 미끄러지듯 한참을 달렸다. 목적지 부근, 차를 오른쪽으로 돌려 수목장 입구로 들어서는데 날씨 탓인가, 몸이 가볍게 떨린다. 이곳은 오래전 고인이 되신 시외조부님, 내 시어머니의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곳이다. 수목장 안 작은 꽃가게 들러, 가게에서 가장 화려한 조화 한 다발을 샀다. 비탈길을 따라 걷는데 몸이 자꾸 떨린다. 묘소 앞에 다다라 "안녕하세요, 저 손부예요." 인사를 드렸다. 캐나다에 계시는 시이모님이 방문하셨을 때, 그리고 언젠가 명절 근처 남편과 찾아뵌 적은 있지만 제대로 인사를 드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몸을 낮추어 준비한 꽃을 비석 옆에 꽂고, 따뜻한 차를 한잔 올렸다. "외할머니 편찮으신데 잘 살펴주세요." 속삭이듯 부탁드리며 고개를 깊게 숙인다.


오늘은 나의 시외조부님의 기일이다. 며칠 전 달력을 확인하고는 댁이 멀어서 성묘를 오지 못하시는 시어머니를 대신해 내가 다녀와야겠다는 마음이 났다. 어머니는 예순이 넘으신 연세에도 여전히 풀타임 며느리시다. 일 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제사와 명절 준비 그리고 집안 대소사를 챙기시는 데에 쓰신다. 그리고 나는, 명절 설거지만으로도 역할에 매몰된 삶을 논하는 이 시대의 파트타임 며느리이다. 소정아, 밥은 꼭 잘 챙겨 먹어라. 태율이도 너무 많이 안아주지 말고. 나이 들면 다 표 난다. 나이 들어 아프면 너만 서러워. 남편은 바쁘고 혼자 두 아이와 분투하던 시절, 어머니가 보내신 문자를 읽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보다 앞서 '엄마'의 삶을 사신 분, 어진 마음과 야무진 손을 가진 그분이 나는 참 좋다. 참 좋아하는데, 그렇다고 좋은 며느리는 아니다. 솔직히 나는 '며느리'가 하고 싶지 않다. 언제든 가용한 노동력처럼 인식되는 것도 싫고, 나의 개성과 가치가 인정되지 않는 것도 싫다. 사실 며느리로서의 나를 향한 가장 큰 기대는 살가움과 싹싹함의 매너인데, 그 기대를 알고 난 후 나는 오히려 더 뻣뻣해져 버렸다. 무슨 반발심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나를 '아들의 여자친구'쯤으로 봐주셨으면 좋겠다. 성격은 어떤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 궁금하기만 한 아들의 여자친구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친정식구이고 싶다. 그녀의 여동생이 되어, 그녀의 애달픔을 달래고 여성으로서의 그녀의 삶을 응원하고 싶다. "어머니, 외할아버지 계신 곳에도 봄꽃이 활짝 피었어요." 문자를 띄운다.  

이전 03화 bewitched_bothered_&bewildered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