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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정 Jun 01. 2021

bewitched_bothered_&bewildered

어느 커플의 이야기

"내가 좀 도와줄게.”

하얀 실로 느슨하게 묶인 낡은 종이 다발을 내려놓으며 남자가 말했다. 여자는, 첫 장의 한쪽 구석에 ‘Atlas of Human Anatomy’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과감하게 단행한 분책의 결과물, 그가 간직한 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학교에 적을 두고 다시 공부를 시작한 여자는 호기심과 열정에 이끌려 겅중겅중 지적 도약을 하게 되리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주어진 정보를 꼭꼭 씹어 착착 흡수하던 이전의 감각은 매우 더디게 깨어났고, 첫 학기에 수강하게 된 해부생리학 수업은 고통의 한가운데였다. 자꾸만 포기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려는 몸부림, 그녀는 그렇게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자와 남자는 책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남자의 길고 가는 손가락이 책장을  넘긴다. 책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로 열린 그의 입술은, 이따금 고요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해부학의 큰 그림을 그린다. 기능적인 움직임을 그리고, 구조적인 뼈대를 설명한다. 그의 손끝을 따라 부분과 부분이 연결될 때마다 여자는 그 모든 것이 이해되는 듯했다. 그녀는 남자의 목소리가 담은 말의 내용이 아닌 흐름을, 그의 옅은 웃음을, 이해를 확인하는 물음을 따라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남자의 옥스퍼드 셔츠가 여자의 팔꿈치에 닿을 때마다 여자의 코끝으로 달큰한 향이 스쳤다. 여자는 숨을 길게, 하지만 최대한 낮고 부드럽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의 손끝이 머무는 곳보다 조금씩 시선을 멀리 두며 그의 옆모습을 눈에 담았다.


'익숙한 새로움'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여자의 남편인 남자, 남자의 아내인 여자, 둘은 부부였다. 결혼이란, 한 사람과 여러 번 사랑에 빠지는 일이라고 여자는 생각했지만, 실상 여자와 남자가 일상에서 감각하기 힘든 것이 바로 ‘로맨스'였다. 그녀와 그는 삶이 그들에게 내주는 심부름을 함께 해나가는 파트너, 그들을 닮은 듯 본 적 없이 독특한 두 어린아이들을 함께 돌보는 공동육아(실험)자였다. 심부름과 돌봄을 끝내고 저녁 테이블에 마주 앉아 함께 맥주를 마시는 술친구였고, 측은지심 가득한 눈으로 서로의 등을 쓸어주는 올드 커플이었다.


그런 여자와 남자가 우연한 기회로 둘만의 짧은 여행을 떠나게 된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만들어내는 편안하고 여유로운 여행이었다. 이른 새벽잠에서 깬 여자는 아침잠이 많은 남자가 늦잠을 잘 수 있도록 조용히 객실을 빠져나온다. 여자는 아침 풍경을 눈에 담으며 홀로 달린다. 그로부터 3시간 후 잠에서 깬 남자는 암막 커튼을 열고 여자가 좋아하는 미술관에 사전예약을 한다. 남자가 동료이기도 하고 벗이기도 다른 남자와 긴 조우의 시간을 가지는 동안 여자는 이불을 턱끝까지 끌어 덮은 채 침대 속에서 영화를 본다. 번갈아 운전을 해 낯선 풍경을 달릴 때에는 끝도 없는 "수다를 피운다.”* 삶에 대하여, 종교에 대하여, 교육에 대하여, 여행에 대하여, 새에 대하여, 아이들에 대하여 기타 등등 떠오르는 대로다. 사랑에 대해선, 수선을 피운다. ‘결혼'이라는 배타적인 관계의 선언을 한 두 사람이 ‘결혼'에서 비껴 나 ‘결혼'을 이야기한다. 더 이상 함께가 아닌 그들의 모습을, 다른 이와 함께인 그들의 모습을 함께 상상해본다. 자유연애라거나, 실험적 관계가 가져오는 그 큰 긴장감을 감당할 체력이 없는 두 사람은(검증되진 않았지만) 상대를 향해 묘한 애석함을 느낀다. '낡은 결혼과 이별하는 졸혼이라면…', 하고 여자가 생각하고 있는데 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코너를 돌아 멈추어 선다. 차에서 내린 남자가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나타난다. 여자와 남자는 한쪽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혀끝으로 조금씩 핥아먹는 아이스크림의 맛이 진하게 고소하다. 은은하게 달콤하다. "아, 맛있다.”, "정말 맛있다.” 감동을 추임새처럼 주고받는다. 여자는 언제까지 그녀의 남편일지 모를 남자를 바라본다. 함께 매혹당하고, 함께 괴로워하고, 함께 어리둥절해하며 사랑에 빠지는 그들이었다. “다 먹었으니 이제 가자.” 여자와 남자는 가볍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길 위에 오른다.       


*최근 출간된 번역서 ‘아인슈타인과 랍비’에서 빌려온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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