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원 탐구생활 9화
'띵동!'
"1030번 고객님~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번호를 땡긴다. 대출 접수된 건이 많아 바빴던 시기가 지나고 숨통이 좀 트이던 중, 새로운 난관을 만나게 됐다. 그것은 바로...
"안녕하세요! 저, 펀드 하나 가입하고 싶은데 추천해주실 만한 게 있을까요?"
'심쿵!'
심장이 쿵쾅거리는 데에는 크게 2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고객이 직접 펀드를 가입하고 싶어서 오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기뻐서이다. 둘째 이유가 이번 이야기의 주제인데, 바로 올해 3월부터 시범적으로 도입된 '금융소비자보호법(줄여서 금소법)' 때문이다. 과거 DLF 사태라든가, 라임 펀드 사태 등의 굵직한 사건이 터지면서 오랫동안 국회에 잠들어있던 금소법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상대적으로 정보력이 약한 고객의 입장에서는 상품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충분히 들을 필요성이 있고, 그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는 게 맞다. 그런 장치들을 만드는 건 좋은데, 작성해야 할 서류와 절차가 너무 복잡하다는 단점 또한 크다.
번거롭게 만들어야 소위 불완전판매를 방지할 수 있는 거 아니냐, 라는 의견을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고객과 직원 모두 힘들게 만드는 일이다. 직원이야 당연히 힘든 건데 고객은 왜?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례를 통해 한번 체험해보자.
<금소법 시행 이전>
고객: 저 펀드를 가입하고 싶은데 하나 추천해주실 수 있으세요?
직원: 네 고객님~ 혹시 투자하시고 싶은 금액은 얼마 정도인가요?
고객: 음, 한 달에 50만원 정도는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직원: 아 그러시군요. 그럼 투자하시는 자금을 언제쯤 빼서 사용하실지 구체적인 계획이 있으세요?
고객: 아뇨, 딱히 없어요. 뭐 필요할 때 중간에 해지할 수 있으면 더 좋을 거 같긴 해요.
직원: 그쵸, 적금도 마찬가지지만 펀드도 중간에 아무 때나 해지하실 수 있어요. 물론 해지하실 때 펀드의 수익률에 따라 원금보다 많이 받느냐, 적게 받느냐의 차이는 있겠지만요. 그래서 최소 1년 이상 자금을 안 쓰실 생각이시면, 적은 금액을 매달 적립식으로 입금하시는 방법이 장기적으로 볼 때 유리...
-> 이런 식으로 물 흐르듯이 상담을 시작하여 고객의 자금계획에 맞춰 적절한 펀드를 추천하게 된다. 물론 무조건 펀드만 추천하는 게 아니고, 적금, 청약, IRP 등의 니즈가 있는지 확인하고 골고루 추천한다. 그럼 다음 예시로 넘어가 보자.
<금소법 시행 이후>
고객: 저 펀드를 가입하고 싶은데 하나 추천해주실 수 있으세요?
직원: 네 고객님~ 투자상품에 대한 상담을 원하신다면, 먼저 '투자성향분석'을 실시해야 합니다. 이는 '금융소비자보호법' 제정에 따른 고객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절차로, 고객님의 투자성향에 알맞은 상품에 대해서만 상품을 추천해드리고 설명해드릴 수 있습니다. 설명을 원하시면 앞에 쓰여있는 항목을 읽어보시고 본인에게 해당되는 답변을 체크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상품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조차도 '금소법'에 따라 정해진 절차를 거쳐야만 가능하게 바뀌었다. 심지어 단순히 펀드의 수수료 같은 걸 문의할 때도 '특정 펀드의 이름'(펀드는 이름이 긴 편이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히 찝어서 문의를 해야 앞서 실시했던 '투자성향분석'을 생략할 수 있다(아니,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오?).
사실 금소법 시행 전에도 이런 절차를 거치게끔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고객, 직원 모두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불필요하게 소모시킨다는 인식이 강했고, 실제로 영업할 때 이를 제대로 지키는 직원은 아마 거의 없었을 거다. 제 살을 깎아먹으려는 게 아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는 말자는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금소법 이전부터 시행해온 이런 투자상품 판매 절차는 '정보의 약자' 편에 있는 고객에게 필요한 것이 분명하다. 은행에서 근무하는 나조차도 각 잡고 공부하지 않으면 잘 모를 정도로 다양하고 어려운 게 금융상품이다. 그런데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은 고객, 심지어 예적금만 가입해오셨던 고연령층의 고객들은 오죽할까.
그래서 고연령 투자자(고객)의 경우 전용창구가 따로 지정돼있기도 하고, 몇 가지 설문항목이 추가되고 절차도 더 복잡하게 돼있긴 하다. 그러나 이런 '연령에 따른 기준'도 좀 애매한 게, 예전부터 이런 상품을 자주 접해왔던 어르신들은 젊은 사람들보다 오히려 상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투자도 더 잘하시는 경우도 많다. 그런 분들에게조차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일괄적으로 상담 내용을 녹음하게 하고, 상품 가입 시간을 30분에서 1시간 가량 걸리게 하는 이 시스템, 과연 옳은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주기적으로 ELS(일정한 기간마다 주가지수를 평가해서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원금+이자를 주는 투자상품)를 가입하셨던 60대의 고객이 ELS를 재가입하고자 오셨다. 보통 ELS의 가입 주기가 6개월 정도인데, 지난번 가입하셨을 때는 금소법 시행 전이었고, 이번에는 금소법이 시범 운영된 이후에 오신 터라 추가된 절차와 예상 소요시간을 안내드렸다. 그러자 고객의 반응은?
"아유.. 지난번에는 별로 오래 안 걸리더니 왜 이렇게 복잡해졌어? 그냥 안 할래.. 통장 잔액 다른 은행계좌로 이체나 해줘~ 거기 가서 비과세 예금이나 하게.."
안 그래도 투자에 소극적인 성향인 분들이 많이 오시는 은행이라, 투자상품을 가입하시는 분들이 적은데 이렇게 마음을 돌리시는 분들이 생기면 힘이 빠지기 마련이다. 물론 열심히 설득해서 상품 신규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한번 불편한 마음을 먹으신 고객을 다시 설득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금소법 시행 초창기엔 더 힘 빠지는 일들이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투자 상품을 권유하기 위해서는 '투자성향분석'을 먼저 실시해야 한다. 뭐, 번거롭지만 그까이꺼 하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하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투자성향분석을 1일 1회로 횟수 제한을 걸어놨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상품을 가입하러 온 고객이 투자성향분석 결과 '위험중립형'이 나왔는데 가입하고 싶은 상품의 등급이 그보다 높으면 가입을 할 수가 없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원하는 저 상품을 가입하겠다'라는 입장이라면 내일 다시 은행을 방문하여 '투자성향분석'을 다시 '공격적'으로 실시하고 상품을 가입하는 방법이 유일하다. (...)
나: "고객님, 이번에 금소법 시행으로 가입 절차가 좀 바뀌었어요. '투자성향분석'을 먼저 해주시겠어요?"
고객: "네, 뭐 예전에도 했던 건데 하면 되죠~"
톡톡톡, 슥삭슥삭...
'고객님의 등급은 '적극투자형'입니다.'
나: "아... 고객님, 이 상품은 공격투자형이 나와야 가입이 가능하신데 적극투자형이 나오셨어요.. 정말 죄송하지만 내일 다시 방문해주시면, 다시 해보고 가입하실 수 있는데 괜찮으실까요?"
고객: "네?? 아니.. 이거 하려고 일부러 시간 내서 왔는데 내일 다시 오라고요? 내일 시간 안되는데 큰일이네.."
나: "죄송해요 고객님.. 저희도 어쩔 수가 없어서요.."
고객: "안된다는데 뭐 별 수 있나요. 내일 시간 봐서 다시 올게요.."
그렇게 내 앞을 떠나간 고객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까? 원칙적으로 투자성향분석은 고객이 직접 본인의 상황에 맞게 판단하고 항목을 체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산이 얼마고, 부채는 얼마이며, 투자경험은 얼마나 있는지 등을 작성하는 것이다. 그 답변에 대한 점수를 합산해 구간마다 등급이 매겨지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81~100점은 공격투자형, 61~80점은 적극투자형, 41~60점은 위험중립형.. 이런 식이다. (정확한 점수는 아님)
그런데 여기에 맹점이 있다. 평균을 특정하긴 어렵지만 대한민국 평균의 자산과 부채를 보유하면서 적당한 수익률을 추구하는 성향이라고 가정하고 분석을 해도 '공격투자형'이 나오기가 매우 어렵게 돼있다. 공격투자형이 가장 높은 등급이니, 어려운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고 유명한 '펀드'나 'ETF'의 경우 대부분 1~2등급이기 때문에 '공격투자형'이 아닌 고객은 가입을 할 수가 없다. 등급이 높은 이유는 주식의 비중이 많기 때문이고, 채권 등 안전한 자산이 많은 펀드는 등급이 낮은데, 우리가 매우 쉽게 거래할 수 있는 증권사의 '주식'의 경우 이런 절차 없이 정말 쉽게 사고팔 수 있다.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은행이란 곳은 물론 증권사처럼 주식 관련 상품에만 집중하는 곳도 아니고, 보험사처럼 장기상품만 파는 곳도 아니며, 대부업체처럼 대출만 해주는 곳도 아니다. 은행은 오랜 세월 동안 실생활에 가장 밀접하게 지역경제와 함께 해온 금융기관이다. 사용하기에 간편하고 또 안전하게 고객의 자산을 관리해줄 수 있는 안식처 같은 곳으로써 존재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도록 존재하려면, 건강한 제도권 안에서 건강한 문화를 바탕으로 건강한 재무구조 위에서 영업을 해야 고객들에게 신뢰와 수익을 동시에 가져다줄 수 있다.
지금 은행은 과연 그럴 수 있는 환경에 있는지 의문이다. 정부의 계속된 규제와, 과도한 실적주의로 인해 파생된 고객의 불신과 직원의 피로도 증가 등 넘어야 할 숙제가 산더미다. 금소법의 본래 취지는, 고객의 알 권리 보장과 피해 입증 책임을 고객이 아닌 금융기관(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으로 옮겨 고객의 불편을 줄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절차는 더욱 복잡해졌으며 금융기관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이전보다 더 방어적이 되어가고 있다. 이는 결국 고객들이 업무 보는 시간을 대폭 증대시키고, 보다 다양한 상품을 추천받을 기회를 잃게 만들고 있다. 특히, 금융취약계층(고령자, 주부, 은퇴자 - 실제 이렇게 분류하고 있음)에게는 더 많은 금융지식을 얻을 수 있는 일종의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결과를 만들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이 사실 가장 두렵다. 일부의 피해를 막기 위해 다수의 기회를 빼앗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 말이다.
솔직히 10년 가까이 은행에서 일하면서 실적에 대한 압박은 항상 있었기에 익숙하면서도 힘든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손님에게 별로 안 필요할 것 같은 상품을 억지로 판매한 적은 거의 없다(아예 없다고는 말 못 하겠다, 양심적으로). 오히려 '이 사람에겐 진짜 이게 필요할 텐데, 이 상품 정말 괜찮은데, 한 번쯤 가입해봐도 전혀 손해가 아닐 텐데, 해보면 생각이 달라질 텐데'와 같은 마음을 갖고 일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단순히 내 영업 스킬의 부족 때문이 아닌, 이런 제도적 장치 때문에 손님들이 불편한 마음을 갖고 상품 가입을 포기하는 경우를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이것 또한 현업에 있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규제와 실무 사이에서 성과를 창출해내는 건 보통 일은 아니다. 아직도 날마다 쏟아지는 각종 규제 시행, 변경 공문들을 보며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어쩌겠나. 내일도 손님은 우리 은행을 찾아올 것이고, 우리는 손님의 이익과 은행의 이익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해 열심히 영업을 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내가 은행에 남아있을 때까지는 말이다.
(금소법의 시행 취지에 공감하는 바이지만, 실무적인 고통과 고객이 받는 불편함 또한 크기 때문에 제 경험을 토대로 작성한 글입니다. 혹시 불편하신 분들이 있다면 의견 남겨주시면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사진 출처: Photo by Ethan Johnso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