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원 탐구생활 6화
"송금 처리 다 됐습니다, 고객님. 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저... 이 통장도 좀 이상한거 같은데 한 번 봐주실 수 있나요?"
"아 네, 주시면 제가 확인해드릴게요."
타다다닥, 타다닥. 탁!
“고객님, 이 통장은 예전에 만기가 돼서 이미 해지하진 통장이네요. 헷갈리시면 해지 도장 한번 찍어드릴게요.”
“아.. 제가 정신이 없어서 깜박깜박해요~~ 저, 그럼 이것도 한번 봐주실래요? 예~전에 주거래로 쓰다가 한참 된건데 다시 쓸 수 있나 해서요~”
“아~ 네. 그것도 주시면 확인해볼게요.”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오신 김에 다 하고 가세요^^;"
오고 가는 통장 속에 서류와 서명이 오고 가고, 감사인사와 추가용건 질문도 오고 간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업무의 끝자락에 다른 볼일은 없는지 다시 물어보지 않으면, 하려던 일을 까먹고 그냥 가시는 고객님도 종종 계신다. 그래서, 솔직히 조금 귀찮은 일이지만 꼭 되묻는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시냐’고.
이 고객님은 다른 분들에 비해 필요한 게 좀 많으신 편이다. 다들 생업에 바쁘시다 보니 은행 방문할 시간이 부족한 게 일반적이라, 한 번 왔을 때 뽕을 뽑아야(?) 하는 게 효율적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해하고 또 이해하려 하지만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듯 업무가 이어질 땐 가슴이 묵직해져온다. 밤고구마 반 개를 미처 다 씹지 못한 채 삼킨 것처럼.
업무 처리에 많은 시간이 걸릴지라도, 고객 대기시간을 고려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예상 소요 시간을 계산하며 일을 해야 한다. 대기하는 손님이 적을 땐 앞에 앉은 손님에게 좀 더 집중을 하고, 대기자가 많을 땐 앞 손님도 중요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체크한다. 그래서 업무가 애매하게 길어질 때는, 양해 인사를 드리며 조기에 상담을 종료할 때도 있다. 가령, 앞서 예로 들었던 손님처럼 주요업무는 다 했는데, 기타 궁금했던 사소한 부분들에 대한 문의가 계속될 때는 이렇게 말씀드린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뒤에 기다리시는 손님이 많아서요. 문의하신 내용은 제가 설명을 드린 것 이상으로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댁에 돌아가셔서 혹시 또 추가적으로 문의하실 게 생기면 전화 주시거나, 한 번 더 방문 부탁드릴게요.”
이런 뉘앙스로 말씀드리면, 대부분은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주섬주섬 짐을 챙겨 자리를 비켜주신다. 물론 지금 해결해드리는 게 마땅한 업무거나, 다시 은행에 오기 정말 어려워보이는 상황(주관적인 판단이 필요하지만, 최대한 상황을 고려해 결정한다)일 경우에는 대기고객이 많아도 업무를 진행한다. 그럴 땐, 팀웍이 필수다. 사내 메신저를 통해(5화 참조) 창구 업무가 길어지는 상황 + 대기고객이 많은 상태를 알리고, 헬프 요청을 하면 업무가 빨리 끝난 직원이 목소리를 높인다.
“456번 고객님~~! 오래 기다리셨죠? 제가 최대한 빨리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점심시간이라 창구가 다소 밀리는 상황입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드릴게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위의 말처럼, 본인의 차례가 늦게 와 불만이 쌓인 고객과, 그밖에 객장에서 오래 대기 중인 고객들 모두 감정을 어루만져드리는 멘트가 필요하다. 이런 대처가 적절히 이뤄지지 않으면 꼭 한번씩 큰소리가 나곤 하기 때문에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응대가 필요하다(2화 참조).
그래도 이런 유형의 손님들은 양해인사를 드리면 협조가 잘 되는 편이라 괜찮다. 더 힘든 분들은 따로 있다. 마치 ‘벽’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분들이 그렇다. 연세가 많아 귀가 잘 안들리시는 어르신 고객이나, 은행 업무를 안해본 사회초년생 고객의 경우 시간이 좀 걸려도 천천히 또박또박 알려드리면 거의 이해하시고 업무를 마무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해를 한 듯 못한 듯 똑같은 걸 계속 물어보고, 업무가 다 끝나고 돌아가신 뒤 다시 전화를 하거나 직접 찾아와서 똑같은 업무 요청 또는 불만 제기를 하는 분들이 종종 나타난다. 이럴 땐 정말이지, 인내심 한계체험 훈련장에 온 듯한 느낌마저 든다. '참을 인' 자를 맘 속에 새기면서 어금니를 악물어보기도 하지만, 가끔은 인내의 끈을 놓칠 때도 있다.
“아이고, 어머니… 제가 아까 오셨을 때 계속 설명드렸잖아요.. 은행이랑, 카드사는 서로 다른 회사라니까요. 은행에서 해드릴 수 있는 건 아까 다 조회하고 처리해드렸고, 나머지는 카드사에 직접 요청하셔야 된다고 메모까지 다 해드렸잖아요오~!(왜 그러세요 진짜 저한테…ㅠㅠ)”
원래, 사내 지침(규정까진 아니고 권장사항으로 알고 있다)으로 손님들에게 ‘어머니’, ‘언니’, ‘형님’ 등의 호칭은 되도록 쓰지 않게 되어있다. 좀 더 전문적이고 공식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느낌을 손님('손님'이란 호칭보다 '고객님'이란 호칭을 더 권장한다)께 드리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그러나 위처럼 멘탈이 약간 나갈 때는 그런 강제성 없는 지침에 연연할 틈이 없다. 손님, 아니 어머니 뻘의 고객에게 (이제 그만 날 놓아달라는)하소연을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물론 나의 실수로 인해 업무 처리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는 고객이 있을 땐 하소연이 아니라, 내가 뭘 잘못했는지 곰곰히 생각해보고 고객에게 피드백과 사과를 드리는 게 마땅하다. 앞서 보여드린 예시들은, 객관적으로 내가 특별히 잘못한 게 없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해프닝들이었다. 하지만 다음에 소개할 사례는 내가 실제로 업무적인 실수를 했을 때 벌어졌던 꽤 골치 아팠던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머리가 지끈거려오는 사건이지만 앞으로도 내가 은행에서 업무를 계속 한다면, 아니 어디서든 고객을 응대하는 일을 계속 한다면 가슴에 새겨둬야 할 교훈(?)이 있는 사건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날. 계절에 상관없이 우리는 때가 되면 이사를 가고, 대출을 상담 받는다. 이사를 가기 위해 전세대출을 받게 되면, 2년이 지난 뒤 대출 연장 심사를 받기 위해 은행을 다시 방문한다. 실수요자들을 위해 꼭 필요한 전세대출은 정부의 지원으로 여러 가지 상품이 출시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중소기업 취업청년 전월세보증금대출'이다. 이는 전세대출을 알아본 사람이면 한번쯤 들어봤을 '버팀목' 전세대출 중 하나로, 말 그대로 중소기업에 취업한 청년이 전세 또는 월세 계약을 했을 때 그 보증금에 대해 대출해주는 제도다. 대출 신청 요건은 다음과 같은데,
1. 주택도시기금에서 규정한 내용에 따른 '중소기업'에 재직중이거나 정부기관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창업한 사람 중,
2. 특정 연령 이하이면서(현재는 만 34세 이하, 군복무시 더 늘어남)
3. 모든 세대원이 무주택자이고,
4. 부부 합산 소득 5천만원 이하인 자(외벌이 또는 단독세대이면 3천5백만원 이하)
(이외 세부내용 생략)
위와 같은 사람들에게 무려 1.2%의 저금리로 대출을 해주기 때문에 조건이 맞는 사람들에겐 매우 매력적인 상품이라 할 수 있다. 무주택자들을 위한 전세대출 제도는 예전부터 있어왔지만 상대적으로 사회 진출한지 얼마 안된 청년층에게 유리하게 설계한 상품은 이것이 거의 최초였기에 출시 초기부터 많은 관심이 쏠렸다. 게다가 전세대출 중 최초로 전월세보증금의 100%를 대출해준다는 파격적인 조건은, 자금이 부족한 이들에겐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다만, 보증금의 100%를 대출해주기 위해서는 보다 더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해야 했다. 예를 들어, 아파트나 빌라(다세대 주택)의 경우 개별 등기(건물 한 채 통째가 아닌, 한 호수마다 소유자가 다르게 쪼개진 것)가 돼있기 때문에 본인이 이사 가려는 집에 저당권 설정이 안돼있거나 적게 설정돼있으면(집주인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으면 그 집에 저당권을 설정한다) 대출이 가능하다. 그러나, 원룸(다가구 주택)의 경우에는 등기가 개별로 돼있지 않고 건물 한 채에 통으로 돼있기 때문에 내가 살게 될 원룸 뿐만 아니라 옆집, 윗집, 아랫집에 사는 사람들의 전월세 보증금까지 나의 전세대출에 영향을 끼친다. 집주인이 해당 원룸 건물을 담보로 받은 대출은 당연히 영향이 있이고. 그래서, 난이도가 제일 높은 축에 속하는 것이 '다가구 주택'에 들어가는 전세대출이다.
예전에는 이런 다가구 주택에 들어갈 경우 대출한도가 적게 나오거나 아예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사회초년생이나 신혼부부 중 대부분은 원룸이나 투룸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다가구 전월세 대출을 보완할 필요가 있었을 거고, 그에 맞춰 나온 상품이 바로 이 '버팀목 중소기업 취업청년 전월세보증금대출(이름도 참 길다)'일 것이다.
이 상품이 출시된 지 얼마 안됐을 때, 나에게 대출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이 있었다. 나보다 4~5살 정도 어렸던 걸로 기억하는, 인근의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직원이었다. 보증금의 100% 대출을 요청하러 온 사람들은 다 해당 상품을 알고 온 것이기에, 절차가 복잡하더라도(혹은 상품을 잘 모르더라도 공부를 해서) 최대한 꼼꼼히 심사를 한 후 대출을 실행해야 한다. 나는 당시 대출을 많이 취급하지 않는 지점에 있었고(핑계는 아니지만) 갓 나온 상품이라 내용을 정확히 몰라 규정팀에 문의를 해가면서 대출을 접수했다. 그리고, 입주 일정에 맞춰 고객에게 보증금 100%의 전세대출을 해드렸다. 그 후 2년의 시간이 흘러가고..
새로운 지점으로 옮긴 지 1년이 넘은 나는 예전과 많이 다른 환경에 적응하여 열심히 대출을 상담하고 있었다. 이미 해당대출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고, 그 대출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의 케이스를 경험하며 업무적으로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고 믿고 싶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에 근무했던 지점의 직원에게 연락이 왔다.
"대리님~ 잘 지내시죠? 혹시 2년 전에 대출해드렸던 분 중에 OOO님이라고 기억나세요?"
"안녕하세요~ 네, 고객정보 불러주시면 한번 조회해볼게요. 타다닥 타닥! 아, 신분증 사진 보니 누구인지 기억나요. 근데 왜요?"
"아 네~ 이분이 중소기업 전세대출 100% 한도로 나갔었거든요. 근데..."
무슨 문제라도 생긴걸까 하는 마음에 귀기울여보니, 대출 만기가 되어 연장 심사를 해야 하는데 처음 대출을 실행했을 당시에 대출한도를 잘못 산출해서 연장이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오 마이 갓..!
연장이 안되면 다른 대출로 대환을 하든,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짧게 얘기한 다음 각자 닥친 일들을 처리했다. 은행 창구에 있다 보면 수많은 대출을 실행하고 관리를 하기 때문에 별의 별 일들이 다 생기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운 형태의 상품이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수습을 해야 하니, 업무 마감 후 다시 한번 해당 고객의 정보를 조회하여 과거에 내가 심사한 서류를 살펴봤다.
"계약서는 잘 받았고.. 재직 서류, 소득 서류 다 이상 없고.. 뭐가 문제지? 슥슥.... 아, 이런.. 임대차 현황서를 안받았구나..!!"
앞서 말한대로, 다가구 주택에 전세대출을 해주기 위해서는 해당 건물 전체에 대출이 얼마가 있는지, 고객이 들어가려는 집이 아닌 다른 집에는 누가 보증금 얼마에 살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가령, 10억짜리 다가구 주택에 대출이 5억 있어서 근저당권이 6억(대출의 120%) 잡혀있고, 이미 살고 있는 세입자들의 보증금을 다 합쳐 2억이 잡혀있으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대출은 10억(주택가격)-6억(근저당)-2억(다른집 보증금)=2억 이내에서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물론, 이 상품의 최대한도가 1억으로 제한돼있어서 2억을 해드릴 순 없지만, 어쨌든 규정상 통과가 되려면 이런 계산을 거쳐야 한다. 이 계산을 하려면 당연히, 해당 건물에 누가 얼마에 살고 있는지 조사를 해야 하는데 그걸 내가 누락하고 대출을 해준 것이다. 오 마이 갓...22222222
현재 그 대출의 사후관리를 맡고 있는 직원에게 연락하여, 내가 실수로 누락했다고 말씀드렸고 직원분은 규정팀에 확인해서 잘 처리해보겠다고 답하셨다. 경험상, 방법은 항상 있었기에 잘 해결되리란 믿음을 갖고 나는 다시 내 앞에 쌓인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사진 출처: Photo by ahmad gunnaivi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