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모두들 모여주세요. 이번 달 영업 우수직원 시상이 있겠습니다. OOO 대리, OOO 차장~! 박수!!"
"와~~ 축하드려요~~~ 짝짝짝짝!!!"
덕담과 커피 상품권이 오가며 훈훈하게 아침을 열게 해주는 mini 시상식이 진행되고 있다. 앞선 대사에서 눈치챘겠지만, 내가 다니는 은행에서는(아마 대부분의 금융권에서도 그럴 듯싶다) 매달 영업실적이 우수한 직원들을 선발하고 공지한다. 은행 차원에서는 포상 포인트를 부여(사내 쇼핑몰에서 사용 가능)하고 인사기록에도 올라가기 때문에 꽤나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지점 차원에서는 별도의 중복 시상을 하기보다는 또 다른 평가 기준에 맞게 우수직원을 뽑아 시상을 하곤 한다(은행원 탐구생활 3화 참조). 관점에 따라서, 적절한 동기부여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어떻게든 수익을 쥐어짜 내기 위한 무한 프로모션의 일환이라 볼 수도 있겠다.
은행은 영리법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연간 영업목표를 세울 것이고 그에 따른 세부계획을 짠다. 솔직히 은행의 목표 설정 방식에 대해서는 과연 제대로 하는 게 맞나?라는 개인적인 의심을 갖고 있지만, 어찌 됐건 목표를 제대로 수행해내려면 좋은 작전이 있어야 할 것이다. 목표 달성을 위한 작전 중 하나로, 직원들의 개인 성과 평가 + 은행 전체의 수익 증대 =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것이 바로 이 <이 달의 영업 우수직원(실제로 이런 이름을 쓰진 않는다)> 제도인 것이다.
나는 은행에 입행한 지 9년이 되도록, 단 한 번도 영업 우수직원 명단에 올라본 적이 없었다. 스스로 영업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딱히 영업왕 타이틀 같은 게 탐나 지도 않았다. 은행에서 일하면서 내가 재미를 느꼈던 때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도전했던 때가 유일했다. 예를 들면, 사내 방송국에서 모집하는 방송 패널에 지원하여 참여했던 일이라든가, 연말 실적평가 행사(은행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행사라고 볼 수 있음) 중 직원 참가공연에 2년간 참여했던 일 같은 것 말이다(그냥 노는 거 좋아하는 애 같다). 업무적으로는 영업이 안 맞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직접 마케팅 대상을 찾아서 공략할 때는 성과가 크지 않아도(대부분 성과가 적었다) 보람을 느끼곤 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영업이 잘 될 때는 탄력이 붙어서 한 번에 몰아치기(?)가 될 때도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는 꽤나 재미를 느껴 즐기기도 했다.
불과 몇 달 전 우수직원에 딱 한 번 선정되어 그 달달한 맛을 경험해보았다. 하나 그 한 번의 경험으로 사람들 앞에서 '영업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엔 그 무게감이 떨어질 것도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랜 기간 창구 일선에서 다양한 '영업 능력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느꼈던 경험은 꽤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만난 '영업 능력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환경이라는 '운'의 요소와 실력이라는 '노력'의 요소가 공존했다는 것이다. 이는 '나의 영업 우수직원 선발' 경험에도 매우 크게 작용했다.
"과장님... 이 지점 너무 바빠서 숨도 못 쉬겠어요. 빼도 빼도 번호표가 줄어들지를 않아요 ㅠㅠ"
과거에 나와 함께 근무했던 직원이 다른 지점으로 발령이 났는데, 그 지점은 이 지역에서 가장 바쁘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방문하는 손님 수 자체가 많은 데다, 인근에 많은 기업체들, 지역 유지 등 다양한 고객층이 존재하여 그야말로 대환장 파티가 매일 벌어지는 곳이라, 다들 가기를 꺼려한다는 썰이 돈다. 그러나, 고생하는 만큼 영업의 기회가 많은 곳이기에 열심히 번호를 당기고(손님을 호출한다는 뜻) 하루를 마무리하다 보면 실적이 쌓여간다는 것이 업계의 정설(?)이다. 때문에, 성과에 대한 욕심이 있는 자들은 가고 싶어 한다는 말도 들린다. 물론 나는 굳이 가고 싶진 않지만(성향이 확고한 남자다)..
이렇게 바쁜 지점에서 일하다 보면, 영업에 대한 욕심이 없던 사람도 자연스레 영업의 기회에 계속 노출이 되고, 실제로 실적이 늘어나면서 탄력을 받게 된다. 내 앞에 앉는 손님마다 대출이 필요하다, 청약을 만들어달라, 적금 추천해달라는 말을 하는데 어떻게 실적이 안 좋을 수 있을까? 대출이 필요한 손님은 한도를 더 늘리고 싶을 것이고, 금리도 낮추고 싶을 것이며, 은행에서 좋은 대접을 받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그렇게 손님들은 은행의 필요에 의해서, 또 본인의 필요에 의해서 상품을 가입하고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니즈를 잘 충족해준 은행원의 실적 쪽지에는 체크된 항목들이 빼곡할 것이고, 그런 하루가 이어지다 보면 '이달의 영업 우수직원'이 되는 것이다. 일종의 선순환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대로, 손님이 잘 오지 않는 지점에서는 그나마 오는 손님들을 어떻게 해서든 붙잡으려 온갖 술수(?)를 써야 한다. 그만큼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음에도 적은 성과가 나니, 동기부여가 되기도 어렵다. 이는 효율성을 떨어뜨려 단기간의 영업에서는 어떻게든 실적을 채운다 하더라도(이럴 때마다 등장하는 지인영업+가족영업+구걸영업 3종 세트) 3개월, 6개월, 1년간의 긴 농사에서 풍작을 이루기는 어렵다. 에너지의 고갈과 자괴감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내가 이러려고 은행 들어왔나?' '응 맞아'
노력이 필요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환경이 열악하더라도, 그 안에서 방법을 계속 찾아내고 시도하는 사람들은 성과를 창출해낸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환경이 나아지면 훨씬 더 잘 해낼 것이지만 말이다. 환경에 굴하지 않고 정말 꾸준히 방법을 찾고 시도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나 또한 매번 환경에 굴복하여 여러 가지 시도들을 하다 포기하곤 한다. 지금 근무하는 지점에 발령받고 6개월 근무하는 동안 벌써 십 수번의 타깃 리스트 선정 + TM(텔레마케팅)을 시도했지만 리스트의 첫 고객부터 끝 고객까지 TM을 다 해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영업 성공이 아니라 전화 시도 자체만이 어도). 하다 지치거나, 하다 다른 급한 일 하고, 하다 다른 타깃을 먼저 하라 해서 또 그거 하고... 삼천포 빠지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벌써 하반기도 절반이 지나버렸다.
만약 내가 TM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타깃 고객들이 많이 방문을 했다면, 나는 훨씬 적은 노력으로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내가 영업 우수직원으로 뽑혔을 때 정말 확실히 느끼게 됐다.
지난 여름,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였지만 손님은 꾸준히 은행을 찾아왔다.
(영업 우수직원 제도는 상대평가라, 우리 지점이 있는 곳이 바쁘면 자연스레 유리해질 수밖에 없다. 코시국에 대부분 지점이 한가했고 평소보다 이 달의 은행 직원들 실적 점수는 매우 낮은 편이었다.)
그렇게 많이 몰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엄청 한가하지도 않게 말이다.
(너무 바쁘면 일에 집중하기 어렵고 효율이 떨어지는데, 너무 한가하면 영업할 기회가 확 차이 나니 역시 효율이 떨어진다.)
여름은 이사철이 아니라 대출의 성수기가 아닌데 이상하게도 신용대출이 필요하다며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여기뿐이겠냐마는, 최근 집값이 계속 오르다 보니 주담대(주택담보대출)를 추가로 받으러 오는 사람도 꾸준히 있었다.
(우수직원 평가에는 집 관련 대출(전세, 주담대)과 중-저신용 고객의 신용대출에 대한 평가도 포함돼있다. 집 관련 대출이야 꾸준히 있다고 해도, 중-저신용 대출은 조건에 맞는 고객이 알아서 오지 않는 이상 하기가 정말 어렵다.)
대출이야 생활이라 치자. 은행원들이 가장 영업하기 힘들어하는 상품이 바로 투자상품(펀드, ETF)과 장기상품(방카슈랑스:보험, IRP:퇴직연금)인데 정말 이상하게도 펀드에 관심 있다고 오는 손님과 세액공제에 관심 있는 손님, 예금이 만기 돼서 왔는데 금액도 크고 여유기간도 넉넉한 손님이 계속 오시는 통에 권유하는 분들마다 영업에 성공했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겠다. 말 그대로, 타깃 고객이 저절로 오셔서 나에게 상담을 받고 상품을 가입하셨다.)
그렇게 나는 한 달간 나의 모든 운을 다 써가며(?) 영업을 했으나, 내가 우수직원에 선발될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한 달의 마지막 영업일에는 실적을 공개하지 않는데, 그 전날까지 내가 커트라인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동안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우수직원이었기에 될 거란 감조차 잡지 못했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는 말은 나에게 진리에 가까운 말이었다.
행복한(?) 한 달을 보내고 나는 여전히 열심히 일을 했지만, 귀인처럼 상품에 대한 니즈가 충만한 채로 다가오던 고객들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TM을 하기 위해 타깃 리스트를 만들기 시작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단대출(분양된 아파트 단지의 입주를 위해 단체로 신규하는 대출) 시즌이 다가오자 점점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수직원 선발 소식을 접한 것이다. 두둥..!
앞서 말한 대로, 나는 평소처럼 일을 했을 뿐인데 손님들이 알아서 상품을 가입하러 왔고, 하나둘씩 실적이 늘어가자 더 신이 나서 영업을 하게 됐다. 이는 선순환을 일으켜, 평소 같으면 내 말빨(?)에 안 넘어왔을 사람들까지 넘어오게 만드는 적극적인 영업을 했다. 그리고 실적의 상위권에 올라가자 '해볼 만하겠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고 역시 힘을 내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때 열심히 했던 실적이 그다음 달까지 이어져서 특정 상품에 대한 프로모션에서 전국 20위 안에 들어 포상을 받는 일까지 있었다면, 이것은 과연 단순한 운일까, 실력일까?
나는 이런 현상을, 운과 실력이 적절히 섞인 결과라 말하고 싶다. 내 상황은 조금 극단적이었고, 일회성이었기에 표본이 되긴 힘들다. 고로 운팔기이(운80%,실력20%) 정도라 말하고 싶은데, 평소에 꾸준히 우수직원에 선발되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운삼기칠 정도는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처음부터 잘하진 못했을 것이다. 좋은 멘토가 끌어줬든, 스스로 살고자 열심히 노력했든, 기를 쌓아가는 시간이 있었을 테고 그렇게 쌓인 기(실력)와 운(새로운 환경)이 만나며 폭발하는 시기를 거쳤을 것이다. 그리고 한번 폭발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를 기폭제 삼아 꾸준히 실력을 발휘하며 성취감을 느꼈을 것이다. 선순환을 느끼면서 말이다.
나는 비록 한 달 천하(?)로 끝났지만, 그들의 성취감을 조금이라도 느껴볼 수 있어 잠시나마 즐거웠다. 과연 또 언제쯤 그런 성과를 낼 수 있을지 감도 오지 않는다. 운이 없다 생각되면 결국 기를 쌓아야 하는데, 기를 쌓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꾸준해야 하고,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며, 감정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갖가지 쏟아져 나오는 공문과 신상품, 새로운 프로모션 속에서도 멘탈을 잡고 영업을 지속하는 자들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가 바로 그곳이다. 나는 유리 멘탈형 인간이라 그런지(아니면 잡생각이 많은 인간이라 그런가) 번잡한 은행 내부 세계와 손님들과의 얽히고설킨 감정노동에 쉽게 지치곤 한다. 그래서 나는 운칠기삼을 진리라고 합리화하며, 기는 30%만 쌓아놓고 있을 테니 저번과 같은 70%의 운이 찾아와 주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