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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네시 Sep 21. 2021

저기요, 제가 먼저 왔는데요?

은행원 탐구생활 2화

"띵동! 1024(천이십사)번 고객님~"

"....."

"1024(천~~~이십~~~사~~)번 고객님~~~"

"....."

"띵동! 1025번 고객님~~"


호명한 손님이 나타나지 않아, 급하게 다음 번호를 호출한다. 이럴 때마다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대부분 겪어 봤겠지만 불길한 예감은 꼭 들어맞는다.


"...저기요~~~~.....저 번호 지났는데요??"


자주 있는 일이라 익숙하지만, 바쁠 때 이렇게 순서가 꼬이면 매우 난감해진다. 먼저 자리에 앉은 손님과 번호가 지난 손님, 그리고 나(또는 다른 직원) 사이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둘 다 손님이고 어차피 처리해드려야 할 일이니 최대한 잡음이 없도록 교통정리를 한다.


"고객님, 제가 몇 번 불러드렸는데 안 계신 듯해서 다음 분 호출했거든요. 잠깐 앉아계시면 다른 창구에서 다시 호출해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이렇게 무난한 멘트로 차례가 지난 손님께 양해 인사를 한 뒤, 앞에 앉은 손님의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역시 인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변수는 항상 생기기 마련.


"아니, 잠깐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믿을 수 밖엔 없다) 불렀는데 제가 어떻게 와요. 저 한참 기다렸는데(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 중 절반 이상은 10분 이내로 기다리신 분들이다. 물론 오래 기다렸다는 시간의 기준은 각자 다 다르지만) 저 먼저 해주세요."


예전 같았으면 매우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앞에 앉힌 손님과 뒤에서 씩씩대는 손님의 눈을 번갈아 살피며 진땀을 흘렸겠지만 지금은 당황하지 않고 재차 안내를 한다.


"네, 고객님~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근데 이 분도 바로 다음에 오셔서 비슷하게 오래 기다리신 분이라서요. 제가 최대한 빨리 처리해드리고 업무 도와드리거나, 옆 창구 중 업무 빨리 끝나는 곳에서 바로 도와드리도록 말씀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이 정도면 매우 무난하게(?) 방어할 수 있는 멘트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렇게까지 말씀드렸는데도 더 억지를 부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거의 없다는 건 그래도 조금은 있다는 뜻). 그러나 여기서도 주의할 점은 있다. 뒤에 있는 손님은 진정시킬 수 있는 멘트이지만, 내 앞에 앉아 업무 대기 중인 고객이 만약 예민한 분이라면 이런 응대에도 불만을 표시할 수 있다(고객 서비스 업무란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다시 깨닫는다).



1. 전투적인 분들이라면, 뒷사람(번호가 지나간 고객)에게 "본인이 제대로 못 듣고서는 왜 난리야?"라는 식의 멘트를 한다. 이럴 때는 싸움이 커질 수 있기에 중간에서 빠르게 커트해야 한다. 가령, "아, 고객님. 죄송해요. 저분도 오래 기다리셨는데 잠깐 나갔다 오시는 사이에 호출했나 봐요. 두 분 다 이상 없이 처리해드릴 테니, 양해 부탁드려요. 죄송해요~"라는 식의 추가 멘트를 던져야 진정시킬 수 있다. 물론,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던져진 불씨 때문에 뒷사람이 반격을 하면 그땐 어쩔 수 없다. (경찰까지 출동할 만큼 큰 일은 잘 벌어지지 않는다)


2. 방어적인 분들이라면, 뒷사람에게 뭐라고 하진 않고 나에게 "아니, 저도 업무 볼 거 많은데 왜 빨리 해요? 제 업무는 제대로 해주세요."라는 식의 멘트를 한다. 그렇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멘트를 하는 건 어렵다(이래서 정치인들이 공약을 내는 게 어려운 거구나, 싶은 생각이 갑자기 들기도 한다). 어쨌든, 더 중요한 건 바로 내 앞에 있는 손님이니 당신에게 최대한 집중할 것이란 걸 어필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고객님 불편하시게 해 드려 죄송해요. 고객님 업무 먼저 처리해드리는 게 순서니까, 뒷분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계세요. 제가 잘 처리해드릴게요."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손님들의 성향에 따라, 세부적인 상황에 따라 알맞은 멘트와 어투, 태도를 잘 선택해서 응대를 해야 고객 민원을 최소화할 수 있다. 서비스 직에 종사하는 많은 분들은 공감하실 것 같다. 아무래도, 고객 만족도 조사 같은 업무가 주요 평가항목 중 하나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욱 신경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말 쉽지 않다, 고객 응대.




은행은 사실,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지만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상당히 고압적인(?) 태도로 고객 응대를 했다고 한다. 선배들의 라떼 이야기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은행 창구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대출 상담을 해줬다'는 이야기였다. 지금처럼 대출이 쉽게 나오지 않던 때라, 은행원이 소위 '갑'의 위치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랬던 시절이니 '고객 만족', '고객 서비스' 등의 개념이 있었을 리가 있겠나.


그렇다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가끔 터무니없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고객이나, 예의 없이 직원들을 대하는 고객들을 만날 때면 나도 사람인지라, '만약 지금이 그때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물론 위와 같은 류의 고객을 만나면 최대한 정중하게 응대를 하며 위기를 극복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은행이나 서비스 업종의 고객만족도 평가제도를 대략 알고서 대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쉽게 상황이 해결되지 않을 때도 많다. 정해진 답이 없는 것이 고객 응대이기에, 항상 긴장감을 갖고 일해야 하고,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기도 하다.


그러한 숙명을 안고 사는 데에 따른 피로도 때문인지, 가끔은, 아주 가끔은 은행 KPI 평가 시스템에 몰래 접속해서 '고객만족도 평가' 관련 항목을 삭제해버리는 상상도 해본다. 자세한 사례를 언급하긴 어렵지만, 마음의 상처를 깊게 안겨주는 손님들을 응대하고 난 날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편한(?) 마음으로 일하고 싶어 지기 때문이다(일은 무슨, 그냥 바로 퇴근하고 싶은 때가 더 많지만).


평가 따위는 상관없이, 그냥 평범한 감정과, 상식적인 과정으로 일을 마무리하는 일과를 누리고 싶어지는 그런 날. 영업이 잘 안 되고, 업무 중 실수가 있어 만회하느라 고생했지만, 사람 때문에 힘들진 않았던 그런 날. 그런 날을 좀 더 자주 경험하고 싶은 건 욕심일까? 욕심이 아니길 희망해본다.



여러분은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내셨나요? 상대의 마음을 배려하는 하루를 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도 그런 마음으로 지냈는지 돌아보며 글을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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