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늘하다. 뭔가 잘 못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머리가 띵하다. 눈을 비비며 무거운 상체를 일으켜 스마트폰 시계를 본다.
'06시 40분'
믿을 수 없다.
'내가 지각이라고? 신입인 내가? 이런 젠장!!'
나는 대한민국 은행원이다. 입행(은행에서는 '입사' 대신 '입행', '신입 직원' 대신 '신입 행원'이라는 단어를 주로 쓴다)한지 겨우 두 달 남짓 된 신입 행원인데,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7시면 내가 가장 먼저 출근해서 지점의 세콤 경비를 해제하고 들어가서 선배들을 맞이해야 하는데 지금 이대로라면 세수도 안하고 옷만 입고 나가더라도 7시 반 도착 각이다. 하... 술이 웬수다...
혹시 앞선 문장에서 놀라신 분이 있을 것 같아 미리 설명하자면, 대한민국의 은행 지점 대부분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7시에서 7시 반 출근이 예사였다. 최근 도입된 주 52시간제 덕분에 강제(?)로 여유있는 출근과 퇴근을 할 수 있게 됐지만 그 땐 그랬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두 은행에서 해결하고 오는 날이 1주일에 3일은 기본이었다. 덕분에 내 배는 점점 올챙이처럼 변해갔었지...
7시에 출근해야만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였다.
첫째, 할 일이 많아서.
둘째, 할 일이 딱히 많은 건 아닌데 옆 자리 선배가 일찍 출근해서.
셋째, 할 일이 딱히 많은 것도 아니고, 옆 자리 선배가 일찍 출근하는 것도 아닌데 지점장님이 일찍 출근하셔서.
넷째, 아침잠이 없어서.. 는 아니고 나야말로 아침잠 많은걸로 따지면 국내 서열 TOP급은 되는데 사회생활을 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일어나게 되더라. 자본주의의 맛을 느끼기 시작한 신입 행원이었다, 나는.
이유가 어찌 됐든, 암묵적으로 대다수 지점의 출근 시간은 7시였고 여유 있는 곳이 그나마 7시 반 출근을 허용(?)해줬다. 우리나라엔 여러 곳의 경비업체가 있는데 내가 다니는 은행은 '에스원(세콤)'과 계약이 돼있었고, 우리는 편의상 '경비'라는 단어를 '세콤'으로 치환해서 불렀다. 그 세콤을 하는 일은 주로 신입 행원과 그 바로 윗짬밥의 행원들, 그리고 대리들이었다. 세콤을 하려면 7시까지 출근을 해야 하기에 매우 피곤한 일인데다 이른 아침에 머리 감고, 말리고,왁스로 세팅해야 하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런 상황에 아침을 먹는다는 건 사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해낼 수 있었던 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작은 보상'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 2만5천원의 근무수당.
물론 큰 금액은 아니지만(그래도 평균적으로 한달에 5~10번 정도 하면 12~25만원 버는 셈)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열정페이보단 나으니까. 가끔 집안일 또는 데이트 약속이 생겨서 당번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일이 생기면 당번 수당의 절반만큼 계좌이체를 해주기도 했다. 그게 암묵적인 룰이었으나, 입 싹 닦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고 들었다. 가만, 나도 후배한테 그랬었나...?(음 이 얘기는 없던 걸로 하자)
아침 출근의 고난은 내 은행생활의 절반이 넘게 지속됐다. 올해가 입행한 지 만 9년이 되는 해인데 6년은 지점의 막내 생활을 했고, 3년 정도는 후배가 있는 지점에 있어서(그래봐야 총 인원 중 70% 이상이 나보다 선배) '세콤'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세콤을 통해 얻는 수당이 쏠쏠하기도 했고, '어차피 막내고 고생하는 건 매한가지인데 그냥 하자'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닳고 닳은 9년차 과장이 되어 어떻게든 5분이라도 늦게 출근하려고 기를 쓴다. 5분 더 일찍 출근할 수 있음에도 침대에서 5분 더, 화장실에서 5분 더, 주차장에서 5분 더 밍기적댄다. 아, 물론 5X3= 15분을 밍기적대는 건 아니고 선택적으로 1일 5분 정도만 그런다. 나도 양심은 있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면서 은행도 느리지만 변하기 시작했다. 근무시간의 규제로 인해 출근 시간이 여유로워지니 숨통이 좀 트이기 시작햇다. 야근은 필수, 저녁식사는 선택이었던 일상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강제로 통제가 되다 보니 정작 해야 할 일을 제대로 꼼꼼하게 못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잠을 더 잘 수 있는 건 맞는데, 퇴근 후 마음이 찝찝한 경우가 많아졌다. 예전 같았으면 몸은 고될지라도 밀린 대출심사를 어느 정도 끝내놓고 마음 편하게 퇴근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후다닥 일을 끝마치고 지정된 시간에 PC를 꺼야 하기에 급한 대출이나 업무를 마무리하지 못한 채 퇴근하면 잠이 잘 오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야근을 하기 위해, 상사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요상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루는, 내일 당장 나가야 하는 대출 서류를 보며 전산등록이 잘 돼있는지 확인하던 중, 절차 중 하나가 누락된 걸 발견하고 키보드를 급히 두드리던 찰나,
갑자기 PC의 화면보호기가 팍! 켜진다.
‘18시 00분’ (오후 6시가 되면 PC사용이 중단되고, 10분 간의 마무리 시간을 보너스로 준다)
이럴 땐 어찌 해야 하나? 다행히도 방법은 있다. 10분 단위로 연장근무를 신청한 후 지점장님의 승인을 받으면 된다. 물론 이걸 지점장님이 반기진 않는다. 정해진 연장근무시간 한도가 초과하면 추가수당이라는 인건비가 지급되기 때문이다. 고로, 주어진 시간 내에 최대한 정확하고 빠르게 일처리를 해서 이런 사단을 예방해야 하는 것이다. (도저히 물리적으로 6시까지 마감할 수 없는 지점도 꽤 있다. 그런 곳은 그냥 어쩔 수 없이 KPI 감점 등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야근을 한다)
제도의 변화가 가져온 일상에는 이런 압박감도 분명 존재하지만, 어찌 됐든 하루의 업무시간이 줄어드니 불필요한 회의와 각종 연수 등도 줄어드는 순기능도 있었다.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만족감은 달라질 것이다.
아래 두 사례를 비교해보자.
A 직원은 개인의 역량을 성장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새로운 업무를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적응도 필요하고 업무가 어려워 배우고 싶은데, 관련 부서는 전화연결도 잘 안되고, 원래 업무를 맡았던 전임자는 타 부서로 발령이 나서 매번 물어보기가 어렵다. 같은 지점 동료들에게 묻고 싶어도, 짧아진 근무시간에 다들 자기 일을 하기에도 바빠 누구를 가르쳐주고 할 여유가 없다. 마감 후나 퇴근 후 근처 카페에서라도 스터디를 하거나 도움을 요청하고 싶은데 직원들은 각자의 가정과 생활터전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그걸 기대하기도 어렵다. 줄어든 근무시간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감이 안 오는 A 직원이다.
B 직원은 아침 회의 시간이 지옥 같았다. 매 주 실적보고와 마케팅 계획을 발표해야 하는데, 실질적인 아이디어 회의는 찾아보기 어렵고 부진한 실적에 대한 질책과 한탄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매번 똑같은 방식의 프로모션과 n분의 1로 실적 할당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거면서 굳이 왜 모이는지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1주에 1~2회는 꼭 바쁜 아침 시간에 모여서 이런 패턴을 반복한다. 그러다, 최근에 아침 출근 시간이 강제로 늦어지면서 아침 회의가 주 1회 이하, 10분 이하로 단축됐다. 마침 새로 오신 지점장님이 근무시간 정상화에 관심이 많으셔서, 불필요한 회의는 지양하고 최대한 실시간 보고를 구두로 하자고 하신다. 마감 업무가 많아 항상 시간에 쫓겨 일하던 B는 이제야 좀 사람답게 일하는 것 같은 느낌에 행복감을 느낀다.
(위의 A와 B의 상황은 현실에 입각하여 가상의 상황을 만든 것임)
위에서 본 것처럼 직원들 개개인의 목표나 환경, 지점장님의 성향에 따라 이에 대한 만족도는 달라질 수 있겠다. 수많은 은행원 중 내가 보는 현재의 은행 출퇴근 시간은, 상당히 만족스러운 수준까지 왔다. 물론, 더 바쁜 지점으로 가면 금방 또 만족도가 떨어질테지만.. (바쁜 지점에 근무하는 분들에게 응원과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
오후 6시가 다가오면 PC화면 한 켠에 메시지가 뜬다. 업무시간에 집중해서 일하고, 행복한 취미생활,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라는 이 메시지를 볼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든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제도나 회사는 존재하기 어렵겠지만, 적어도 은행에서 이를 절충하려는 노력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이렇게 씁쓸한 마음을 안고 키보드를 두드리다 보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다 됐다.
'업무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오후 6시가 되면 귀여운 은행 캐릭터가 나를 바라보며 퇴근하고 어서 가라는 듯한 미소를 짓는다. 예전에는 이런 아름다운 미소 대신 “오늘 저녁 뭐 먹을까?" 라며 저녁 식사 주문하라고 지시하는 선배들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이제 그런 풍경은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그래,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매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야지. 감지덕지 해야지. 올챙이 적 생각해야지. 라고 생각하면 그건 너무 꼰대같은 마음일까?
꼰대여도 좋다. 남한테 과거의 악습을 강요만 하지 않는다면, 난 꼰대라 불려도 괜찮다.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하면서 과거를 추억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꼰대로 불릴 리스크를 지님과 동시에 꽤나 재밌는 일이다. 그 재미를 통해 또 하나의 행복을 찾는다면, 그런 리스크를 헷지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래서 난 계속 기록을 남겨보련다. 신입 시절의 어설펐던 내 모습, 성장통을 겪으며 적응해가는 모습, 현실을 알아가며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모습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