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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네시 Oct 06. 2021

평생 잊지 못할 스벅 커피와 케익 선물

은행원 탐구생활 5화

"지이이잉~ 철컥!"


오후 4시가 되면 은행 셔터는 굳게 닫힌다. 하루 종일 밀려드는 손님들을 응대하느라 녹초가 된 직원들에게는 잠깐의 여유를 주는 시간이다. 말 그대로 '잠깐의 여유'가 지난 뒤에는 또다시 열을 올려 마감 작업과 밀린 대출심사, 서류 정리, 마케팅 업무 등을 실시한다. 조각조각 흩어진 집중력을 모아 PC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을 때쯤, 그때마다 불청객처럼 불쑥 모니터 화면을 뒤덮는 노란 쪽지. 요란한 효과음과 함께 나타나 지친 몸도 마음도 더욱 어지럽히는 장본인들이다.


웬만한 규모의 회사에는 사내 메신저가 있을 것이다. 은행은 대면으로 고객 응대를 하기 때문에 이 사내 메신저를 통해 소통을 하는데, 개인적인 용무는 거의 '대화' 기능을 통해 실시간 소통을 하지만 다수에게 공지를 할 때는 '쪽지' 기능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물론 제 기능을 할 때도 많지만 너무 잦은 쪽지는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역효과와, 두통을 유발하는 아주 나쁜 기능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마감 시간 이후에 쏟아지는 '격려'를 빙자한 '압박' 쪽지에 힘들어하곤 한다.


나도 크게 다르진 않다. 메신저의 순기능을 떠올리며 '그래, 다들 보내는 이유가 있겠지.' '직접 전화해서 길게 얘기하는 것보단 낫겠지.'라는 식의 생각으로 나를 위로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쪽지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모니터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하기도 한다. 모니터를 치지 않았을 뿐, 이미 내 입술은 알 수 없는 방언을 중얼거리며 거센 말들을 내뱉고 있을 때도 많았다.


대부분의 내용은 굳이 공유 안 해줘도 될 것 같은데, 라는 입장이었으나 '고객 칭찬 메시지'를 공유해주는 건 개인적으로 즐겨 읽고는 했다. 물론 비뚤어진 시선으로 보면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느껴지는 칭찬 메시지도 있었고, 딱히 별일을 해준 것도 아닌 듯한데 누구는 칭찬받고, 누구는 칭찬은커녕 진상 고객 만나서 한참 시달리고 불만 접수받나? 하는 경우도 있겠다. 그렇지만, 개중에는 꽤 흥미로운 칭찬 메시지도 종종 섞여있었고, 때론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고객 접점인 창구에서 일하다 보면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케이스들을 경험한다. 다른 은행 같았으면 단칼에 거절했을만한 일을(왜 자꾸 OO은행으로 가라고 손님을 보내는 거야.. 아놔..) 어떻게든 도와드리고 싶어서 어렵게 해결해드린 경우도 종종 있었고. 그러나 대부분의 손님들은 형식적인 감사 표현은 하지만 적극적으로 칭찬 메시지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남들의 칭찬 메시지를 보며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며 샘을 낸 것일 수도 있겠다. 못난 놈)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분들은 다들 같은 마음이겠지만, 고객에게 뭘 바라고 일하는 경우는 없다. 영업직이라면 영업 실적을 바라긴 하지만, 굳이 서비스 만족도에 대한 칭찬을 남겨주길 바라면서 일하진 않는다. 다만 나도 사람인지라 힘들게 문제를 해결해드리고 나면, 칭찬 메시지까지는 욕심이고 진심 어린 감사의 표현은 듣고 싶기도 하다. 그런 보람을 느끼는 게 이 업종의 보상 중 하나랄까.


그래도 종종 감사의 표시로 음료수나 빵 같은 걸 사다주시는 분들도 계셨고, 그때마다 실제로 감사함과 뿌듯함을 느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 그런 감사 표시를 처음 받았을 때, 기쁨보다는 놀라움이 더 컸던 게 사실이다. '이런 정도에도 감사함을 느끼는 고마운 분들이 있구나'라는 생각에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은행 생활에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역사적'이란 표현이 좀 과장되긴 하지만, 처음 있던 일이고 사내 게시판에도 이름 석자를 남긴 일이니 내 기준에선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이상하게 최근 1-2년간 좋은 일들이 몰아서 생기는 느낌이다. 이러다 내년에 망하는 거 아니겠지?)


여느 때처럼 번호를 땡기던 나는, 어떤 신혼부부 고객의 대출상담을 하게 됐다. 마스크를 쓴 상태로 상담을 하기 때문에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진 못하지만(신분증을 봐도 솔직히 기억에 잘 남지 않는다. 맨 얼굴을 오래 보지 않는 이상) 아담한 체구의 여자분과 다부진 체구의 남자분이 쭈뼛쭈뼛 내 앞으로 다가와 대출상담을 요청했던 모습이 첫 기억이었다.


남자분(남편)은 내 기억이 맞다면 소득증빙 등의 이슈로 대출조건이 불리해서 배우자인 여자분이 차주(대출을 받는 사람)가 되어 대출을 신청하고 싶다고 했다. 고로, 나는 여자분에게 포커스를 맞춰 상담을 진행했는데 대부분의 사회초년생이나 신혼부부가 그렇듯 대출 경험이 없어서인지 쑥스러워하거나 약간 당황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분 역시 그랬다. 특히 남편분이 옆에서 같이 설명을 들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일 때문에 바빴는지 남편분은 먼저 자리를 떠났고, 결국 여자분 혼자 상담을 이어갔다.


신혼부부가 우대를 받을 수 있는 대출은 종류가 다양하고 세부규정도 자주 바뀌는 편이라 상담을 하러 오시면 다른 대출보다 좀 더 꼼꼼하게 알아봐 드리곤 한다(규정이 자주 바뀌니 귀찮아서 외우지 않는 건 비밀). 특히 이 고객의 경우 소득이 어떻게 인정되느냐에 따라 대출의 가능 여부와 한도가 결정될 수 있기에 아는 것도 한 번 더 확인해봤다. 거기다, 뭔가 불안해 보이는 듯한 손님의 눈빛(마스크를 써서 보이는 게 눈 밖에 없..)을 보고 나니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설명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네 고객님~ 제가 알아보니, 이 대출을 받으실 조건이 되려면 이러저러한 서류를 요로케조로케 준비하셔서 요런 사이트에 접속하신 다음 이러케저러케 신청을 하신 다음 저희 은행으로 오셔서..."


세세한 설명과 필기는 기본! 고객의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기 위해 눈 맞춤을 해가면서 상담을... 진행하려고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어찌하다 보니 좀 더 열심히 상담을 해드리게 됐다. 규정을 담당하는 본부부서와 통화를 하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30분이 조금 넘었고,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필요한 서류를 다시 한번 짚어드리면서 상담을 종료한 듯했다. 특별한 일은 없었기에 그렇게 상담을 끝내고 여느 때와 같은 하루를 보낸 뒤 다음날 아침..



이런 칭찬 메시지가 와있었다. 세상에나... 이렇게 세세하게 감사인사를 써주시다니.. 이 메시지를 받고 너무 놀랐던 기억이 난다. 정말 뜻하지도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앞에 언급한 대로 어려운 문제를 힘겹게 해결해드렸던 손님이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면 '그래, 칭찬받을만 했다! 수고했다 행춤 과장!'라고 스스로 칭찬했을 법도 하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않은 분께 이런 감사인사를 들으니 어안이 벙벙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익명으로 칭찬글을 남기는 방식이라, 누구인지 추론을 해야 했으나 나중에 한번 더 업무를 보러 오셔서 이 분이었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다)


솔직히 말하면, 이 분이 이렇게 자세히 메시지를 남기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어떻게 상담했는지도 까먹었을 것이다. 바로 다음날 이런 칭찬 글이 올라왔기에 내가 상담했던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를 쓰고 복기했기 때문에 기억을 할 뿐, 일상적인 상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자랑이 아니라, 많은 직원분들이 상담의 퀄리티를 최대한 기복 없게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더 솔직히 말하면,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이렇게 사진까지 찍어서 저장해놓고 있다가 브런치에 글까지 쓰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 날 이후로 나는 상담할 때 조금 더 쉬운 설명, 자세한 설명을 해드리려고 노력하게 됐다. 손님의 정성 어린 마음이, 나라는 한 사회의 구성원을 한 뼘 더 자라게 해 준 것이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 손님 덕분에 나는 '이 달의 친절직원(가칭)' 중 1인으로 뽑혀서 사내 게시판에 오르게 됐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스타벅스 커피와 케익 기프티콘을 받았다. 은행에서 일하다 보면 스타벅스 기프티콘은 정말 숱하게 받기 때문에(대부분의 이벤트를 다 스벅으로 하기 때문. 스벅 우리 덕에 마이 벌었겠다!) 이것 자체가 큰 울림을 주진 않았다. 물론 감사히 받았지만 그보다 더 기분 좋았던 건, 그 메시지를 올려준 손님에게도 똑같은 기프티콘이 발송된다는 공문 내용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크... 간만에 은행이 일을 잘한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이야기가 또 여기서 끝난다면 좀 아쉬울 것이다. 이 손님은 주택도시기금(주택관련대출을 심사, 취급하는 정부기관 중 하나)에서 대출을 심사받은 후 우리 지점에서 대출을 실행하기 위해 다시 방문을 하셨고, 자연스럽게 내가 응대를 하게 됐다. 대출실행 날짜를 협의하고 접수를 마친 뒤 귀가하신 줄 알았던 손님이, 양 손에 익숙한 물건을 든 채로 다시 돌아오셨다.


"제가 은행에서 기프티콘을 받았는데, 과장님 덕분에 받은 거라 과장님 드시라고 사 왔어요 ^^"


이럴 수가... 어디까지 날 감동시키려고 하시는 건지...

눈물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찐으로 감동받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업무 시간 중이라 급하게 건네받은 뒤 인증샷을 찍고(이 순간을 놓칠 수 없다) 다시 한번 감사인사를 드렸다. 아쉽게도 내가 다른 지점으로 인사발령이 난 상태라 작별인사를 해둔 상태여서인지, 왠지 모를 아쉬움이 뒤섞여 감동이 더 크고 진하게 남는 순간이었다.


그 분과 작별한 뒤(?) 벌써 반년이 넘게 지났다. 새로운 보금자리에서는 잘 지내고 계신지 궁금하다. 은행에서 안 좋은 기억을 얻고 가시는 분들도 종종 있지만, 그분만큼은 은행과 좋은 기억을 가진 채로 쭉 지내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인연이 닿으면 또 뵐 날이 있을 거란 기대를 해본다. 그때까지 내가 이 마음을 잊지 않고 일하고 있기를 바라본다. 다시 떠올려봐도, 감사하고 뿌듯한 날들이었다.


아직 세상은 살만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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