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후 네시 Sep 23. 2021

의미없는 회의가 가져다주는 것들

은행원 탐구생활 3화

"자, 다 모이셨죠? 오늘 회의는 저희 지점이 부진한 항목 위주로 이야기해봅시다. 나눠드린 지난주 실적표를 보시면, '카드', '펀드', '방카', '전자금융' 항목 진도율이 뒤쳐지고 있고요. 그리고..."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매주 겪는 일이라 적응될 법도 하지만 아침 회의 시간만 돌아오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시선은 멍해지고, 뇌는 둔해지는 느낌이다. 아침 회의를 효율적으로 해보려는 시도는 전행적으로 오랫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이어지고 있으나, 아침부터 뭔가 활발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과제다. 직원들 다수의 바이오리듬이 깨져있는 시간대가 주로 아침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은행원들은 한창 일할 시간인 9시~16시에는 에너지 소모가 큰 손님 응대 업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침 일찍 또는 저녁 늦게 회의를 해야 한다. 싱싱한 뇌의 상태로 아이디어를 짜내도 모자란데, 하루 중 제일 몸이 덜 풀렸을 때와 가장 몸이 피곤할 때 하는 것이 바로 은행원들의 회의다.


슬프게도, 본래의 목적대로 '아이디어를 내는 회의'를 제대로 해본 기억은 없다. 회의 시간이 20분이라면 10분 정도는 가장 높으신 분(지점장님 또는 부지점장님)의 전달사항을 전달하는 시간이고, 5분 정도는 그분들이 하고 싶은 멘트를 하는 시간이고(뭐가 다른가 싶지만 분명 다르다. 미세하게), 남는 5분 정도만이 다른 직원들이 각자의 시간을 할당받아서 침묵으로 소비하거나 앵무새처럼 비슷한 답을 하는 시간일 뿐이다. 물론, 상사분들의 재량에 따라 회의 시간과 내용이 알차게 진행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회의는 이런 방식이었다. 최근 3-4년 동안 내가 있던 곳에서는 그래도 앵무새 행세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럼, 은행에서 회의를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너무 당연하게도, 영업이익을 내기 위해서다. 아무리 대외적으로 은행은 공공기관의 역할을 해야 한다,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 서민들과 함께 해야 한다 외치더라도, 결국 은행은 사기업이자 영리법인이다. 사회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아침 살아남기 위한 마케팅 방안을 논의하는 것이다.


역시나 아쉽게도, 회의 시간 동안 도전적인 목표 설정과 끊임없는 시도, 창의적인 마케팅 방법 제시와 피드백 같은 건 거의 볼 수 없다. 단지 매 반기마다 늘어나는 목표 실적과 무조건 채워야만 상위 고과점수를 받을 수 있는, 그렇게 점수를 받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고위직 분들의 몸부림과 거기서 떨어진 부산물들이 있을 뿐이다. 그 부산물들은 그저 겉으로 보기 좋게 포장된 프로모션과 이벤트(주로 '고객만족'이라는 포장지로 싸인)를 내세워 직원들에게 '동기부여'를 강요하고, 우리는 매 반기 -> 매 분기 -> 매 달 -> 매주 -> 2~3일 -> 1일 단위로 점점 잘게 쪼개지는 각종 self 프로모션(공식 프로모션이 아니라, 지점이나 창구별로 실시하는 프로모션. 물론 자발적으로 재밌게 일하려고 실시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비자발적임) 속에서 헤엄쳐 나오느라 매일 허덕이고 있다. 하... 쓰다 보니 또 숨이 찬다.


생각해보면, 며칠만 방심해도 실적 집계표에서 쭉 뒤로 밀려나 바로 상사들의 보이지 않는 압박이 들어오기 때문에 1년 중 쉴 틈이 거의 없는 것이 은행원들의 현실이다. 승진을 포기했거나, 직장 내 평판을 포기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 실적에 대한 압박을 무시할 수가 없기에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 쥐어짜 내기 바쁘다. 이는 자연스럽게 고객 서비스의 질을 낮추는 역효과를 가져온다. 왜? 고객이 좋은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직원이 공부를 많이 하고, 보다 여유로운 환경에서, 고객의 니즈에 맞는 최선의 상담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1년 365일 실적에 대한 압박에 피로해진 직원들은 시간을 투자해서 다양한 상품에 대한 깊은 공부를 하기보다, 빠른 시간 내에(손님이 밀리면 고객만족도 평가에서 불리해지고, 심리적 압박이 매우 커짐) 핵심만 설명해서 후다닥 상품 가입을 시키길 선호하게 된다. 그래야만 채울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실적 목표가 주어지고, 그만큼 상품의 종류도 너무 많아서 넉넉히 상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은행을 자주 방문하시는 분들(단순 업무 말고 대출, 투자상품 등의 자산상담 업무를 보시는 분들)은 대략 알고 계실 거다. VIP 창구는 그나마 조용하게 상담할 수 있는데 그마저도 VIP 창구 직원들은 '투자상품'에 대한 실적 압박이 가장 강력해서, 한번 오시는 손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상품 가입을 성공하고자 기를 쓴다. 그런 적극적인 상담을 좋아하는 분도 물론 많지만, 반대로 딱 필요한 업무만 하고 가고 싶은 손님도 많다. 여기서 손님들과의 기싸움도 생기게 마련이다.


상대적 환경이 좋은 VIP 창구에서도 애로사항이 많은데, 노출돼있는 일반상담창구에서는 문제가 더 커진다. 한 번 자리에 앉으면 기본 30분이고, 길어지면 1시간은 후딱 가는 대출 업무가 주를 이루는데 그 와중에 펀드도 팔아야 하고 카드도 섭외해야 한다. 그나마 예전에는 대출 상담 고객에게 부탁이라도 해서 펀드 한 좌씩이라도(계좌를 세는 단위 = '좌') 섭외할 수 있었는데 이젠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 시행으로 그마저도 불가능해졌다. 내가 은행원이고 영업을 해야 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적금으로는 부자가 될 수 없는데 대출 업무 고객은 적금만 가입이 가능한 것이 현실이다(청약도 가능). 씁쓸하다.


규제 일변도의 정책에는 온전히 동의하긴 어렵지만, 필요한 부분이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리고 이런 규제가 생겨난 배경에는 금융기관들의 무분별한 영업으로 인해 소비자 피해가 발생했기 때문이란 것도 안다. 그래도, 좀 심한 것 같다. 내가 은행을 매우 막 사랑하고 은행원의 일 또한 매우 사랑하고 지지고 볶는 건 아니지만, 은행의 사회적 역할과 은행원으로 사는 삶을 꽤나 보람 있게 느꼈던 1인으로서, 이런 변화들이 생기고 난 요즘은, 숨이 턱턱 막힌다. 


글을 쓰다 보니 은행도 깠고, 정책도 깠다. 민망하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도 항상 까면서 남을 까려고 마음먹는다. 나의 행동들에 대한 반성이 없이 남 탓만 하는 것은 내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해당될 말이다). 내가 은행의 발전을 위해 한 것은 무엇이 있는지, 그게 너무 큰 과제라면 지점의 발전을 위해 한 것은 무엇이 있는지, 그것도 너무 버겁다면 '나'의 발전을 위해서 한 일은 뭐가 있는지 하루하루 반성을 하고 있다. 오늘도 퇴근 전 못다 한 업무를 체크하고 업무 일지에 옮겨 적으면서 되뇌었다. '내일은 일을 밀리지 말자'라고. '조금만 더 효율적으로 일하자'라고. '펀드 1좌 꼭 팔자'라고.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내일도 일은 밀릴 것이고, 실적은 해야 하고, 아침 회의는 계속될 거라고. 그렇지만 앵무새처럼 가만히 앉아있지만은 않을 거라고. 가끔은 비둘기처럼 구구구 거리기도 할 거라고. 그리고 그걸 끈질기게 버텨내다 보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무소통 회의를 극복하고, 언젠간 도움이 될 날이 올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다.



여러분의 하루는 어떠셨나요? 오늘 하루가 끝날 무렵, 스스로를 돌아보셨는지요? 업무적인 반성은 했으니, 글에 대한 반성도 해봅니다. 다 쓴 뒤 다시 읽어보면 정말 가관일 때가 많더라고요. 제 글에 대한 피드백을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좋아요와 구독도 부탁드립니다.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이전 02화 저기요, 제가 먼저 왔는데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