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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네시 Oct 15. 2021

반성문을 썼는데, 지점장님께 혼났다. (2)

은행원 탐구생활 7화

"따르르릉~"

"네, 행춤 대리입니다."

"대리님~ 저예요. 지난번 말씀드렸던 전세대출 고객.. 직접 대리님을 찾아가신다고 하네요"


...???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손님은 '대출을 연장해드릴 수는 없고 다른 대출로 대환해야 한다'는 우리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아니, 돌이켜 깊이 생각해보면 손님 입장에서 그렇게 주장할 수는 있다. 애초에 내가 제대로 서류를 받아서 심사한 뒤 대출 불가 통보를 했거나, 조건이 안 맞으니 다른 대출로 취급하자고 했으면 지금 와서 대출을 바꿀 필요는 없을 테니까. 어찌 됐든 내 책임이니, 피할 이유가 없었고 방문하시라 안내를 드렸다. 지금은 과장으로 승진을 했지만 당시에는 대리 직급이라 혼자 해결할 문제는 아니었기에 부지점장님께 보고를 드렸고 손님과 나, 부지점장님까지 3자 대면을 하게 됐다. 시간이 지나 약속한 날이 됐다.


"어서 오십시오~"


2년 전이긴 했지만, 그 손님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던(모든 분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사진을 봤을 때 딱 기억나는 분들이 있다) 나는 그분이 객장으로 들어서자 알아보고 안으로 들어오시라 안내했다. 안 좋은 기운을 감지해서였을까? 왜 얼굴이 기억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렇게 3자 대면은 시작되었고,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행춤: "먼저 제 실수로 불편하게 해 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후략)...."

부지점장님: "행춤 대리가 당시 놓친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중략)... 규정상 대출을 연장해드리는 건 어렵지만, 해당 상품과 동일한 수준의 금리를 쓰실 수 있도록 승인을 받아서... (후략)"


한마디로, 내가 규정대로 대출을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대출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불가하지만, 다른 대출로 바꾸면 금리가 높아지니 우리의 실수로 인한 불편을 보상해드리기 위해 금리를 감면해드리는 대안을 제시해드린 것이다. 그러나, 손님은 완강했다.


손님: "저는 이 대출을 쓰고 싶은 거지, 이자 깎아준다고 다른 대출로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다른 대출로 바꿔야 한다면 저는 다른 집으로 이사 갈 거고, 이자 감면뿐만 아니라 이사 비용도 보상해주세요."


순간, 벙쪘다. 처음엔 귀를 의심했지만 나 혼자 들은 게 아니고 부지점장님도 같이 들으신 게 틀림없었다. 얼굴이 벌개지셔서, 그런 요구를 들어드릴 수는 없다는 말씀을 이어가신 걸 보면 말이다. 분명 최초의 실수는 내가 한 것이 맞고, 대출 연장이 불가하니 대환(대출을 갈아타는 것)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고객 입장에서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저렴한 이자로 2년간 대출을 사용했고, 앞으로의 2년도 동일한 수준의 금리를 제공해드리겠다는 방안도 제시했는데 현금을 더 달라니.. 그걸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부지점장님: "고객님이 원하시는 대로 수용해드리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럼 저희가 대출을 바꾸지 않고 연장할 수 있는 방안이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저희에게 2~3일 정도의 시간 여유를 주실 수 있을까요?"

손님: "당장 내일까지 연락 주세요."


그렇게 우리의 3자 대면은 서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채 무참히 깨졌다. 그 손님은 문을 세게 닫음과 동시에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내뱉고 은행 문을 나섰다. 하... 나 때문에 안 봐도 될 꼴을 보는구나..


나는 자책을 하기 시작했다. 어쩌자고 그 서류를 빼먹어서 이 사단을 냈는지, 왜 좀 더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더 나은 방안을 제시하지 않았는지 말이다. 부지점장님은 나로 인해 면전에서 면박을 당하셨지만 차분하게, 다음에 취할 행동을 지시하셨다. 나는 잘못을 만회하고자 사죄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다른 직원분들께는 죄송하다 양해 말씀을 드리고, 대출 규정 담당자와의 오랜 통화를 이어갔다.


나의 애타는 마음을 알아주셨는지, 규정팀 책임자 분이 답을 주셨다. 현재 건물에 권리 침해된 것도 없으니(가압류 등), 내가 빠뜨렸던 서류를 지금이라도 보완해서 잘 첨부한 뒤 대출 연장하면 큰 문제없을 거라는 입장이었다. 원칙적으로는 대출을 대환하는 게 맞지만, 우리 실수로 인해 발생한 일인데 고객 입장에서 불리한 쪽으로 진행하면 안 되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듣던 중 너무 반가운 소리였다. 왜 진작 이렇게 집요하게 알아보지 않았을까, 왜 먼저 이렇게 답변을 주지 않았을까(적반하장일세)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나는 이 기쁜 소식(?)을 손님에게 알려드리려고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행춤 대리입니다. 어찌저찌 해서... (중략)... 연장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네, 그럼 진행해주세요. 그건 그렇게 해주시구요, 저는 이 부분에 대해 금감원에 민원을 제기할 거니 알고 계세요."


오 마이 갓...333333333 금감원 민원....이 등판했다. 보통 일은 아닌 상황이었다(요즘 금감원 민원을 너무 자주 올려서 금감원 직원들도 싫어한다지만, 어쨌든).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자제시키면서 부지점장님께 보고를 드렸다. 그리고 이건 부지점장님 선에서 해결될 게 아닌, 지점장님께 보고를 드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 망했다... 승진에 욕심은 없었지만, 이로써 물 건너간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쨌거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민원 내용을 정리해서 지점장님께 보고를 드렸다.


"음.. 우선 손님이 이렇게 내용을 정리해서 민원을 제기했으니, 우리도 제대로 답변을 해야겠지? 행춤 대리가 다시 한번 잘 정리해서 한번 가져와봐. 같이 이야기해보자."


끄, 끝인가..? 생각보다 반응이 뜨겁지(?) 않아 의외였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란 생각으로 자리에 돌아왔다. 금감원 민원은 지점 평가에 큰 악영향을 주는 만큼 중요한 문제라, 어쩔 수 없이 창구 업무를 제쳐두고 보고서 작성에 집중했다. 주변 직원들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받으며(죄송합니다..) 열심히 작성한 보고서(답변서)를 지점장님께 다시 들고 갔다.


"행춤 대리, 이건 너무 개인적인 감정이나 추측이 많이 담겨있는 것 같은데? 고객은 지금 객관적인 사실을 나열해서 우리가 절차에 맞게 업무를 처리한 게 맞는지 확인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잖아. 그치?"

"음... 네 그렇습니다."

"그럼 우리도 추측이나 감정을 섞은 글이 아닌, 객관적인 사실들만 서술하면 되는 거야. 고객이 궁금해하는 점이 바로 이거잖아. 이 부분을 무엇을 근거로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알려줘야지. 그래야 의문이 풀리지 않겠어?"

"아... 그렇겠네요... 바로 수정해보겠습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내 딴에는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하면서도 우리의 입장을 잘 대변하는 방식으로 잘 썼다고, 내심 자신감 있게 점검을 받으러 갔었기에 더 충격적이었다. 핵심을 꿰뚫으신 지점장님의 말씀에 감탄했지만,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다시 내용 수정에 들어갔다.


'타다다ㄷ다다다다다ㄱ. 타다닥. 투닥. 타타닥. 타가타다닥.'


밀리는 손님들을 열심히 방어(?)해주는 동료 직원분들께 여전히 감사&죄송한 마음을 갖고 열심히 글을 수정했다. 물론 계속 반성문(?) 수정만 하지 않고, 일도 병행했지만 지점장님이 외근을 하실 때도 많았기에 2~3일에 걸쳐 수정을 해나갔다. 고객이 민원을 제기하고 며칠간의 답변서 제출기간이 있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를 두고 내용을 수정했다.


밖에서 보면, 민원 답변서에 왜 그리 공을 들이나, 또 시간은 왜 그리 걸리나 싶을 것이다. 잠깐 언급했지만 금감원 민원은 시중은행에게는 큰 영향을 준다. 실적평가, 인사평가 등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걸 알고 악용하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하기에 더욱 신중히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이 글에 다 실을 수는 없었지만, 해당 고객이 우리에게 보여준 태도와 말, 민원 의견으로 비추어보았을 때 내부 사정을 모르는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다(물론 이것도 추측이다). 그랬기에 지점장님은 더욱 신중을 기해 의견서를 수정하길 바라신 것이었다. 반면 이런 경험이 없었던 나는, 정말 반성문을 쓰듯이 나의 잘못과 나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나열했다. 그런 나의 글을 읽고 지점장님이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했을지를 떠올리면 지금도 살짝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렇게 며칠간 '족집게 논술 첨삭'을 받는 느낌으로 의견서를 수정받은 나는, 최종본을 들고 다시 지점장님을 찾아갔다.


"그래, 이만하면 됐다. 고생했어 행춤 대리!"

"감사합니다. 저 때문에 고생하셨습니다 지점장님 ㅠㅠ"

"괜찮아~ 덕분에 좋은 거 하나 배웠지 행춤 대리? 다음엔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잘하자."

"네ㅠㅠ 죄송합니다..."


 은행 내 민원담당자를 통해 금감원 민원 답변서를 제출하고, 며칠이 지났다. 기별이 없으니 불안해서 담당자에게 메신저를 보냈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 화들짝 놀라 받아보니,


"대리님 안녕하세요~~~~ 아, 승진하셨네요?? 축하드립니다 과장님~~~"(자랑아님)

"감사합니다 ㅎㅎ 혹시 어떻게 됐나 궁금해서요~"

"아, 금감원에서는 이상 없다고 판단되면 별도로 연락을 주진 않아요~ 후속조치가 필요할 때만 연락을 주는데 며칠 지났는데도 연락 없는 걸 보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렇군요.. 바쁘신데 신경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ㅠㅠ"


이렇게 주변의 많은 도움을 받은 덕에, 나의 '금감원 민원 극복기'는 별 탈 없이 끝나게 됐다. 정말이지,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쯤 민원의 덫에 빠져 승진도 못하고, 자존감도 나락으로 떨어져 영혼 없이 출퇴근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참 감사한 일이었다.






감사하다고 느꼈던 건, 위기 속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은행 업무는 정말 예상하기 힘들 정도로(예상은 할 수 있으려나..?) 다양한 업무를 한 명의 직원이 담당한다. 물론 그 모든 업무를 매일 다 해내진 않지만, 그 모든 업무가 직원이 해야 하는 업무 범위 안에 있기 때문에 규정을 알든 모르든 닥치면 다 해결해야 한다. 일이 다양한 만큼 규정을 검색하고, 문의하는 시스템이 비교적 잘 돼있지만 손님이 만족할 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손님뿐 아니라 직원 스스로도 불만족스럽다).


사실, 여기에는 두 가지 해결책이 있다.

1. 다양한 업무, 계속해서 바뀌고 추가되는 업무를 빠르게 습득한다. (학습능력)

2. 다양한 업무, 계속해서 바뀌고 추가되는 업무를 빠르게 검색한다. (탐색능력)+(잘 정비된 시스템)


1번과 2번은 언뜻 보면 별개의 문제 같지만, 연관이 깊다. 나의 능력도 중요하고 업무환경도 중요하다. 둘 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물론, 조금 더 비중이 높은 건 개인의 능력치라 생각한다. 시스템이 잘 돼있어도 본인이 노력을 안 하고 활용을 못하면 업무 생산성은 떨어질 테니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결국 노력! 공부!만이 살 길이다 라는 결론이 나올 것 같지만 이 사건에서 내린 결론은 조금 다르다. 노력에 의한 사고예방도 중요하지만, 실수나 능력 부족으로 인해 일어난 사고를 빠르고 정확하게 수습하려는 적극적인 태도가 정말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내 실수가 가져올 안 좋은 결과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하지 못했고, 그걸 바로잡을 수 있는 두 번의 기회를 놓쳤다. 첫 번째는 처음 나의 실수를 알아챘을 때 대출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을 더 자세히 알아보지 않은 것, 두 번째는 민원 답변서를 작성할 때 고객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헛소리로 답변할 뻔한 것이다. 첫 번째 기회는, 이런 일이 처음이었고 대출 업무에 치이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고객 입장에서는 불편함을 초래한 부분이니 더는 놓쳐선 안될 것이다. 두 번째 기회는 아무리 처음 써보는 답변서라 하지만, 감정과 추측에 치우친 '반성문'을 쓰다니.. 스스로 많이 반성하게 된 부분이었다. 더불어, '짬바는 속일 수 없다'라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경험이기도 했다. 냉철하게 판단해주신 지점장님 덕분에 큰 고비를 넘을 수 있었다. 내 글을 읽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인사를 드린다.


이날의 교훈을 옛 조상의 지혜가 담긴 말로 마무리해본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사진 출처: Photo by Kyle Glen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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