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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네시 Oct 18. 2021

밥은 먹고 일합시다! 인간적으로..

은행원 탐구생활 8화

“궁금하신 거 있으시면 이 번호로 연락주세요~”

“네, 감사해요. 안녕히 계세요!”

"감사합니다~ 또 뵐게요^^"


'띵동!' 

"1024번 고객님~”


손님과 은행원이 마주앉아 적당한 시간을 보낸 후 서로 헤어진다. 뒤이어 또다른 손님이 빈자리를 채운다. 그리고 또 적당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간다.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은행 지점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웬만큼 창구가 밀리지 않으면 손님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거나 객장이 시장바닥처럼 붐비는 일은 자주 발생하진 않는다. 제3자가 보기에 평화로운 일터의 한 장면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속을 잘 들여다보면, 치열한 눈치싸움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인간이 살기 위한 수단이자 목표이기도 하며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기도 한 '밥먹기'를 위한 싸움이다.


은행 영업시간은 고객 입장에서 짧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시간대로 운영중이다(오전 9시~오후 4시 - 지금은 거리두기 시행으로 오전 9시반~오후 3시반으로 단축중). 그런데 만약 점심시간마저 영업을 하지 않으면 손님들 입장에서는 '대체 은행업무는 언제 볼 수 있는 거냐!'라는 불만이 터져나올 수 있다. 내가 직장인이어도 비슷한 심정일 것 같다. 외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반차나 연차, 외출 등을 자유롭게 쓰기 어려운 우리나라의 잘못된 회사 문화(조금씩 개선중..이겠지?) 때문에 평일에 은행을 직접 방문하기란 꽤 어려운 미션일 것이다. 


실제로 꼭 은행에 나와야 하는 업무 때문에 고객과 통화를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근무 시간 중에 나오기가 힘들다는 하소연을 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개인 업무를 보기 위해 외출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은행원들도 개인업무를 보기 위해 연차나 반차를 쓰기 정말 어렵기 때문에 점심시간을 쪼개서 번개처럼 다녀오는 게 일상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다니고 있는 은행의 업무는 안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것 정도. 그러나 이마저도 본인과 직계가족 업무는 직원이 스스로 할 수 없게 막혀 있어 부탁해야 하는 입장인데다, 다른 은행에서 업무 보는 게 유리한 경우(대출)도 종종 있어 생각만큼 만족스럽진 않은 게 사실이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편한 건 맞다) 


앞서 말한 '개인 업무를 보기 위해 눈치 보며 외출하기'라는 중요 과제는 대한민국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반면에 '눈치 보지 않고 점심 식사하기'라는 과제를 제시한다면 공감할 직장인들이 과연 얼마나 될지 궁금해진다. 추측컨대, 고객 응대를 하는 직업을 가진 분들이라면 꽤나 공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이고, 역사가 오랜(?) 은행이 대표적인 대면 고객서비스 직이 아닐까 싶다.


취준생 시절 은행에 자소서를 접수할 때만 해도, 고객을 실시간으로 대면하면서 종일 일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일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저 안정적이란 이야기, 연봉이 높다는 썰, 정년이 보장될거란 달콤한 말들에 이끌려 원서를 넣었고, 최종합격 통지를 받은 뒤 '내가 왜 뽑혔지?'라며 얼떨떨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그렇다. 은행권에 대한 준비가 철저했던 것도 아닌 내가 덜컥 입행하게 된 걸 보면, 어쨌든 은행에서 나같은 놈을 인재상으로 보긴 봤다는 뜻일 거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나같은 놈이란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업무량과 고객의 민원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꿋꿋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멘탈갑의 소유자'였던 건가? 라는 합리적 의심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만약 그게 인재상이었다면, 잘못 본 게 분명하다. 나도 한때는 긍정 마인드를 장착한 멘탈 금수저, 아니 은수저 정도는 된다 생각했었다. 그러나 은행에 들어온 후로 1년도 채 되지 않아 두통을 달고 사는 건 기본, 악몽에도 자주 시달렸던 걸 볼 때 '메타인지'가 전혀 형성돼있지 않았던 듯 하다. (메타인지: 내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를 아는 것) 멘탈 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내 자신이 매우 둔감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너무 예민해서 밥을 제때 먹지 않으면 일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30년 가까이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깨달았다. 그렇다. 놀고 먹고 자유롭게 할 일을 하던 시절에야 내멋대로 시간 조절을 했으니, 예민함을 느낄 새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직장이라는 틀 안에 들어오고 나니, 인생은 실전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됐다.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 사는 것이다.


이런 명언을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난 맛집을 탐방하는 것엔 큰 관심이 없다. 그러나 밥을 제때 챙겨먹는 것엔 지대한 관심이 있다. 맛의 '퀄리티'보다 중요한 것은 '타이밍'과 '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먹기 위해 산다기 보단 먹고 싶을 때 먹기 위해 산다는 것이 내게는 좀 더 알맞은 표현이 될 것 같다.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먹고 싶을 때 양껏 먹기 위해 사는 것이다.


이런 문장이 어울리는 게 나란 놈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문득 '조금 멀리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에서 일하면서 점심을 제때에 먹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측이 가능한 날들은 그렇다 쳐도(급여일, 각종 공과금&세금 납부일, 월말, 월요일, 금요일, 연휴 다음 평일 등등) 이유도 모른 채 손님들이 우루루 몰려오는 날에는 상당히 눈치가 보인다. 지금이야 제도적으로 식사시간이 보장되게끔 바뀌었지만, 입행 후 6~7년 정도는 점심시간을 챙기는 게 당연한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잘 챙기기가 어려웠다. 특히 나같은 경우 지점에서 항상 거의 막내였기 때문에 객장에 손님이 엄청 밀리는 상황에서 '감히 막내가' 식사를 하러 가는 그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 자체가 너무 불편했다. 


창구가 밀린다 -> 점심 교대 시간이 된다 -> 내 앞 손님 업무가 끝난다 -> 내가 식사를 가야할 타이밍인데 눈치를 보다가 번호를 땡긴다 -> 내가 새로운 손님 응대를 하는 동안 다른 직원이 식사를 간다 -> 제때 밥을 먹지 못해 다운된 컨디션으로 일을 하면서 점점 더 지친다 -> 결국 제일 늦게 식사를 하러 간다 -> 녹초가 되어 밥맛도 없는데다 '아까 눈치보지 말고 밥 먹으러 갔어야 하는데..'라고 자책하면서 에너지를 소모한다 -> 야근을 하든 안하든 일의 효율이 좋지 않고 기분도 좋지 않다 -> 밥을 늦게 먹은만큼 저녁도 늦게 먹게 되어 잠도 늦게 자게 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 이런 날이 쌓이면 점점 번아웃이 다가온다.


창구가 밀릴 거라는 게 예상되는 날이라면 마음의 준비라도 해서 늦게 먹어도 버틸 수 있는 몸상태를 만들거나, 굳은 맘으로 '제가 먼저 식사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일어나 손님들 틈을 당당하게 뚫고 나갈텐데.. 그러나 생각보다 직장생활에 변수는 많이 발생했고, 눈치를 많이 보던 막내(나)는 당차게 의사표시를 하지 못했다. 그렇게 몇 년간을 버티면서, 손님 눈치 보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부르짖었던 순간들이 종종 있었다. 


은행의 점심시간이 이렇게 보장되지 못했던 건, 고객 서비스의 질을 높히기 위한 부분이 분명 컸을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은행 영업시간이 짧다고 느끼는 손님들에게서 1시간의 점심시간마저 뺏어간다면, 00은행 퇴출!이라는 보이콧까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당연히 내부에서도 이런 직원들의 고충과 고객만족 간의 충돌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한 2년 정도 전쯤부터 우리의 점심시간은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제, 막내 신입행원이 눈치가 보여도, 오래 걸리는 업무가 계속 이어지는 날이더라도 오후 2시가 되면 PC가 정지되기 때문에 점심을 먹으러 갈 수 있게 됐다. 


많은 은행원들의 숙원이기도 했겠지만,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먹고 싶을 때 양껏 먹기 위해 사는 것이다.

를 부르짖는 나같은 놈에겐 정말 만세를 부를 만한 큰 변화였다. 솔직히, 나의 경우에 이런 불규칙한 식사가 건강에 악영향을 줬다는 명확한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여러 부분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왔기 때문에 면역이 약해진 건 있었지만 위장이 망가진 정도는 아니었는데, 한때 같은 지점에서 근무했던 선배 한 분은 나와는 좀 달랐다. 


신입행원 때 매우 바쁜 지점에서 근무를 했던 그 선배는 신입에게 잘 맡기지 않는 기업 업무를 맡았던 데다, 업무량 대비 직원도 적었고 일을 잘 가르쳐줄 수 있는 선배도 없는 환경에서 꾸역꾸역 일을 했다고 들었다. 그러다 보니 점심 식사를 거의 거르다시피 했고, 그 당시엔 야근과 회식도 잦았던 때라 위장이 제 기능을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렇게 그 선배는 만성 위염(위궤양이었던 것 같기도)을 앓으며 위장약을 달고 살게 됐다. 지금은 좀 나았는지 모르겠는데, 본인은 그렇게 호된 신입 생활을 하며 피해(?)를 입었음에도 나에겐 화 한번 내지 않고 잘해줬던 고마운 분이었다. 내일 출근하면 좀 괜찮으시냐고 안부 인사라도 해야겠다. 




입사, 승진, 도전, 좌절, 성공, 실패, 불안, 행복..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은 감정들을 겪고 많은 사건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상적이고 거대한 목표, 작지만 확실한 행복과 아담한 목표도 다 좋다. 그러나 건강을 해치면서까지는 하지 않고 싶다. 나는 그러고 싶은데 환경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면, 그 환경을 바꿔야 한다. 물리적으로, 개인적으로 바꿀 수 없다면 이직이라도 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다행히도 나의 큰 과제 중 하나였던 '눈치 보지 않고 점심식사 하기'는 이제 해결할 수 있는 환경이 됐다. 하나의 큰 과제를 해결했으니, 이제 다른 과제를 해결하러 나서야 하나 싶다. 인생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라는 말이 가슴 속에 와닿는 하루다. 


밥은 먹고 일합시다! 인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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