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번째 언어 -스페인어로 살다 #1
스페인에 도착한 날은 8월의 한가운데였다. 마드리드에서 고속기차를 타고 세비야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였고 여름의 세비야는 도심의 온도계 46도를 표시하며 나를 맞아 주었다. ‘46도에 인간이 살기도 하는 구나.’ 그런 충격으로 스페인 세비야 생활의 첫 발이 시작된 셈이다.
기차역에서 내려 25키로와 8키로의 캐리어 두 개를 끌고 겨우 택시를 타고 한달 간 머물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의 벨을 눌러서 사람이 없으면 앞에 바에 열쇠를 맡겨둔 것을 찾으라는 주인과의 메일내용을 기억하며 벨을 눌렀는데 대답이 없었다.
숙소 앞의 바는 낮잠 시간대라서 그런지 한가로웠다.
“안녕하세요! 열쇠주세요”
열쇠 달라고 몇 번을 말해도 종업원은 ‘노, 노’ 하기만 했다. 급기야 안에 있던 다른 직원이 와서 “왜 그러냐” 고 묻길래 다시 열쇠 달라고 스페인어로 하다가 발음이 이상한가? 하고 다시 영어로 ‘키’라고 했다가 문을 돌리는 흉내를 냈다가 했다. 날은 덥고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는 느슨한 스페인사람들의 농담 같은 반응들에 약간 짜증이 나려던 참에 한 직원이 “아하, 열쇠?” 한다.
‘그래! 내가 지금까지 열쇠라고 열심히 말했잖아’
속으로 억울함을 투덜거리는데 직원이 열쇠를 내어주며 말한다.
“no llueve(유에베, 뜻 : 비), llave(야베, 뜻: 열쇠).”
내가 열쇠를 계속 ‘비’라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가 저리도 쨍쨍한데 계속 자기들에게 비가 온다고 했으니 얼마나 이상했을까. 가뜩이나 더위에 얼굴이 후끈거리는데 민망하기 그지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경험한 46도의 더위 탓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집 앞이라 한동안 왔다갔다 하는 길에 얼굴을 보면 “비?”하며 웃는 종업원의 장난스러움에 나도 농담처럼 받아 칠 수 있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시작이라는 것은 조금은 어설퍼야 제 맛이다. 낯선 나라, 낯선 도시, 낯선 집의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려 ‘찰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날 때 쯤에야 ‘휴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태양의 나라 스페인스러운 환영인사가 아닌가? 문득 생각했다. “비가 오지않아!" 이 문장은 스페인에서 열쇠를 획득하기 위한 암호 문장으로는 더할 나위 없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스페인어 알파벳 ll은 뒤에 붙는 모음의 발음을 바꾼다. lla(야),llo (요),lle(예) 이런 식으로 말이다. 우리가 잘 아는 스페인 음식 빠에야도 ‘paella’라고 쓴다. 내가 살았던 도시 세비야 역시 ‘Sevilla’이다. 'ㄹ'이 있다보니 사람들이 많이 혼동하는 알파벳 중 하나이다.
특히 이 발음은 남미 아르헨테나에서는 ‘즈와 츠 발음 중간 쯤’으로 발음이 되어서 처음에는 알아듣기가 좀 힘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알파벳의 발음을 듣고 어느 나라사람인지를 구별하는 힌트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