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제자 이야기

#한국어 수업 12강

by 로하

나의 한국어 첫 제자는 첫 한국어 수업이 시작되었던 스페인 세비야의 작은 한 바 bar에서 만난 카를로스라는 학생이었다. 스페인 살이가 일 년쯤 되었을 때 뭔가 슬슬 먹고사는 문제, 벌이에 대한 생각을 시작했고 컴퓨터에 ‘50만 원 프로젝트’라는 폴더를 만들었다. 어느 직장에 소속된 조직원으로 노동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닌, 내가 가진 자원들을 활용하여 스스로 벌이가 가능한지는 실험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 첫 시작이 한국어 수업이었다. 외국 살이에 대한 생각을 막연하게 하기 시작하면서 회사를 다니며 한국어 교원 과정을 들었다. 그 덕에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스페인에서 단골이 된 바에 종종 붙어있는 개인 클래스 광고문들을 눈여겨본 터라 나도 거기 광고문을 붙여보기로 했다. 스스로 무언가 직접 나를 광고하고 고객을 기다리는 일이 그렇게 어색할 수 없었다.


“한국어로 떠나는 여행”

이 정도의 타이틀이었던 것 같고, 간단한 소개와 함께 이메일과 전화번호를 남긴 A4용지에 아주 심플하게 프린트된 광고문이었다. 바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전단지를 붙이는 내게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뭐 상관없었다. 아님 말고.


그리고 두 주 정도 지났을까. 이메일로 첫 수강신청이 도착했다.

카를로스는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을 보고 충동적으로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진 학생이었다. 특별히 아시아 문화나 특히 한국 문화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언어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학생도 아니었다. 오히려 전형적인 스페인 안달루시아 문화에 충실한 젊은이였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1학기 성적에서 한 과목 빼고는 모두 F를 맞고도 해맑은,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밤마다 파티를 즐기는 것이 신나는 학생이었다.

그러니 수업도 낮잠 자다가 늦기도 하고, 아예 잊어버리기도 하고, 들쑥날쑥 이었다.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공부를 할까. 첫 학생이어서, 그리고 수업시간에는 꽤 열심히 재밌게 집중을 해서 수업을 이어갔는데 신기하게도 그 인연은 내가 스페인을 떠나기 전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대학교 1학년, 학점 관리보다는 매 순간을 즐기는 것에 더 관심 있던 카를로스도 3학년쯤부터는 꽤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학점도 잘 받았다. 어느 해 방학, 친구들과 영국으로 여행을 다녀와서 날씬해진 모습으로 돌아와 놀랐는데 여행에서 만난 여자 친구 때문에 살을 뺐다고 해서 웃었다. 물론 그 모습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한국어 공부로 만났지만 어느새 시시콜콜 일상을 나누는 스페인 남동생 같았던 카를로스가 한결같이 변하지 않은 것은 슬프게도 한국어 실력이었다. 그 정도면 굳이 한국어 수업을 계속할 이유는 없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의리 같은 것이었을까. 잠시 수업을 멈추긴 했어도 꼭 다시 수업을 받겠다고 시작을 하곤 했다.


첫 제자의 이야기이니 뭔가 지금은 거창하게 엄청난 한국어 실력을 갖추고, 여전히 한국어를 공부하며, 뭔가 그 인연으로 한국에서 공부를 하거나 하는 역사적인 결과를 낳았으면 좋겠지만 나의 첫 제자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첫 제자 덕에 두 번째, 세 번째 제자들이 생기고, 세비야의 한 아시아 언어학원과 인연이 되어 한국어 수업을 하게 되었으니 ‘처음’의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그래서 참 고마운 인연이다.


나를 한 번도 선생님으로 부르지 않았던 제자. 뭐든 먹는 것에 진심이어서 한국어보다는 한국 음식을 더 좋아하던, 가끔 김치 한 병을 주면 그렇게 좋아하던 제자, 덕분에 요리 솜씨 좋은 어머니랑 친해져 특별한 날이면 풍성한 식탁에 초대받게 해 주었던 제자.


이 글을 쓰다 보니 연락을 안 한지 꽤 되어 문득 안부가 궁금해진다. 지금은 ‘안녕하세요’ 인사말이라도 기억하고 있을까. 한 때의 관심이란 지속되는 시간이 없으면 금세 아무것도 아닌 무엇이 되어버리지만 그럼에도 나의 한국어 첫 제자가 어느 날 문득 ‘한국’과 관련된 소식을 듣는다면 20대 초반의 본인의 생뚱맞았던 한국어 수업을 기억하며 오래된 노트를 뒤적뒤적해본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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