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라떼 선생님

#한국어 수업 14강

by 로하

학창 시절 선생님들의 칠판 필기를 기억한다. 요즘은 거의 볼 수 없는 풍경일 테지만. 연식을 알 수 없는 시간의 흔적을 가득 담은 노트에 직접 손으로 써서 만든 교재는 고스란히 칠판으로 옮겨졌고, 다시 나의 공책에 옮겨졌다. 아마 몇십 년 교직 생활에 중간중간 빨간 줄이 쳐지고 뭔가 추가 메모가 되기도 했을 거다. 그 낡은 선생님들의 교재들 수명은 언제까지 였을까.


강의를 하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교재나 자료를 만든다. 같은 주제와 내용으로 강의를 할 때면 이미 만들어진 자료들이 있으니 수월할 듯 하지만 한 번도 같은 자료를 그대로 쓸 수 있는 경우는 없다. 강의를 듣는 사람들, 지난 강의에서 보완해야겠다 체크한 부분, 강의 시간 등 그 변수는 다양하다. 한번 만들어 놓은 교재의 수명이 의외로 그렇게 길지 않다는 것을 그렇게 알게 된다. 특히 요즘처럼 짧은 시간 안에 무수한 콘텐츠들이 바뀌는 시대, 다양한 통로를 통해 많은 정보와 소스들이 제공되는 시대에 무언가를 ‘가르친다’고 하는 사람들의 내용은 끊임없이 새로 고침이 되어야 함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콜롬비아 학생들에게 다시 한국어 수업을 하게 되면서 스페인에서 한국어를 가르칠 때 만들어 놓은 PPT자료를 열어보았다. 당시 인기 있던 싸이와 강남스타일이 자료의 많은 부분에 등장하고 있었다.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자료이다. 그때도 이미 한국을 떠난 지 3년 차가 되는 시점에 한국어 수업을 시작했던 터라 방송국에서 일했던 사람의 이력이 무색하게 학생들이 말하는 아이돌 그룹의 계보를 따라가지 못했다. 대부분 한국어를 배우는 친구들의 동기가 KPOP이나 한국 드라마에 있었던 지라 겨우겨우 인터넷으로 알아낸다 해도 내가 직접 즐기는 콘텐츠를 활용하여 수업을 하는 것과 체화되지 않은 문화를 겨우 끼어 맞춰 활용하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한국에 사는 지금이라고 나아졌을 리 없다. 이미 나의 문화 번지수는 리메이크되는 옛 노래의 원곡을 사랑하는 그 자리에 있고, 그에 비해 문화가 바뀌는 속도는 더 빨라져서 그 사이의 거리감은 멀어지면 멀어졌지 가깝지는 않다. 언어를 가르치는데 꼭 그런 흐름을 따라가야 하는가?라고 물을지 모르겠지만 한국어의 경우는 숙명적이다. 한글날 ‘방탄 때문에 한글 배웠다’라는 특집 프로그램을 할 만큼 한국어를 배우는 동기 부여 자체가 지금의 한류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법만 잘 가르치면 되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그들의 흥미가 배움과 연결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걸 모르는 것이 아닌 사람이 과거 동사를 가르치며 선택한 자료는 박진영의 ‘그녀는 예뻤다’였다. 세상에..

개인적인 핑계를 말하자면 이보다 더 과거의 문장을 잘 담은 가사가 없고, 이 노래를 부르던 박진영은 지금 친구들에게 가수 박진영은 아니어도 JYP 소속사 대표로 익숙한 인물이니 그 옛 영상을 보는 일이 신선하지 않을까라는 판단이 있었다. 영상을 찾아보니 그게 벌서 1997년이라는 사실에는 나도 살짝 놀랐다.


영상을 보는 학생들의 표정을 슬슬 살펴보니 역시 약간의 충격과 낯 섬이 보였지만 흥미로 이어지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때는 이 수영춤이 정말 인기가 있었어요. 다들 이 춤을 따라 추었답니다”


영락없는 라떼 멘트를 하고 얼렁뚱땅 얼른 가사에 집중하도록 학생들의 관심사를 돌렸다. 내가 굳이 이 영상을 선택한 것은 나의 취향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저 문법과 찰떡 같이 맞아떨어지는 영상이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듯이.

그리고 생각했다.

이 자료는 다시 쓰면 안 되겠군.


어쩔 수 없는 한국어 라떼 선생님은

부정 명령을 가르칠 때는 GOD의 ‘거짓말’을,

명사를 꾸미는 동사 형태를 설명할 때는 변진섭의 ‘희망사항’을 쓰고 싶다. 이것들이라면 신나게 수업자료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지키지 않을 다짐만 한다.

요즘 노래를 듣자.


*이 글에 나오는 노래들이 왜 각 문법과 찰떡인지를 바로 알아차린다면 반가운 일

keyword
이전 14화과거에 연연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