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진영 Oct 22. 2023

나의 달리기 만트라

어쩌면 나에게 있을 장거리 달리기 DNA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와 관련한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러너들의 만트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파리의 한 호텔방에서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를 읽다가 러너들의 만트라를 언급한 러너 특집 기사를 읽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보며 ‘아, 누구나 계속 달릴 수 있도록 머릿속에서 되뇌는 말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반가웠다.


나의 달리기 만트라는 ‘인류는 장거리 달리기에 최적화되게 진화해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니엘 E. 리버먼이 ‘네이처’지에 기고한 논문 ‘오래 달리기와 인간의 진화’에 따른 것으로, 나는 이것을 웹툰인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에서 보았다.


누군가가 무엇을 해냈다는 것은 어려워 보이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된다.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누군가가 해내면 길이 보인다. 수풀이 무성한 곳을 누군가 걸으면 언젠가 그 뒤를 따르는 이가 생기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걷다 보면 그곳이 길이 되는 것처럼.


날카로운 이빨도, 손·발톱도 없는 인간이 사냥을 할 수 있었던 데는 장거리 달리기에 특화된 몸이 있었다고 했다. 온몸이 땀샘인 사람의 피부는 장거리 달리기를 하기 위한 필수 조건인 체온 조절에 최적화돼 있다.


마라톤을 하다 힘들 때면 나는 언제나 이 사실을 떠올리려 한다. ‘내 조상들은 이보다 훨씬 먼 거리를 달리며 사냥을 하고 살아남았다. 즉 내 몸 안 어딘가에는 장거리 달리기의 DNA가 남아 있다’ 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마치 내가 장거리 달리기에 최적화된, 어쩌면 장거리 달리기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다시 머릿속이 비워지는 때가 온다. 머릿속이 비면 몸의 고통을 잊게 된다.


생각해 보면 나는 자주 이런 식으로 겁이 났던 순간을 이겨냈던 것 같다. 방향감각이 둔한 내가 운전면허 시험을 봐야 했을 때는, 도로 위를 다니는 수많은 운전자들을 떠올리며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이니 분명 너도 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용기를 냈다. 내가 이전에 해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에도 해낼 수 있어’라고 스스로를 격려했을 때도 있었다. 영어 암송 대회에 나갔던 중학교 때 그보다 더 어린 시절 동화책 한 권을 의도치 않게 통째로 외웠던 일을 떠올렸던 것처럼.


심지어 ‘인류는 장거리 달리기에 최적화돼 있다. 나는 인류다’라는 이 만트라는 지금까지 삶을 일궈온 무수한 조상들과 연결된 기분마저 안겨준다. 평소에 자신이 ‘인류’라는 자각을 하며 사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달리기를 하는 동안은 인류의 이 긴 여정에 한 발자국을 더 얹는 기분이랄까.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 인류의 조상님들이 내 달리기 실력을 보고 창피해하시면 어떡하지. 뭐, 모르겠다. 수십억 자식을 낳다 보면 개중 나처럼 못뛰는 쪽도 있는 것 아닐까. 하하.

이전 11화 포기를 통해 배운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