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으로 본 생각거리 25
나아가야 하나, 아니면 물러서야 하나?
이런 진퇴(進退)의 결정을 우리는 종종 마주한다.
특히 둘 다 마음에 안 드는 선택지 앞에 마주했다면
나아감과 물러섬을 어떻게 결정할까?
우리가 자주 하는 방법은
진퇴의 선택을 뒤로 미루고 여유를 가지고 기다릴 것이다.
혹시 더 나은 선택지를 선물같이 오기를 고대하면서.
그러나 많은 경우 제때를 놓치면
선택지가 좋아질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진다.
좋든 싫든 가능하면 닥칠 때 선택하는 것이 낫다.
비록 불확실성을 밑에 깔고 선택하는 것이 불안하지만.
그때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선택의 미비한 점은 내가 올곧이 감당하겠다는
당찬 의지를 가슴에 품고 선택해야.
그러면 최종적으로 나아감과 물러섬은
어떠한 마음의 지표에 의지해서 결정해야 할까?
주역(20-3)을 보자.
여기 가엾은 여성이 있다.
그녀는 서른 살이 넘도록 책임자도 못 되었기 때문에
여성 중심 문화에서 찌질이라고 멸시를 당한다.
이웃 세상으로 가려니 그곳은 남성 중심의 겸손 문화이어서
여성은 순종만이 있고 주체성은 죽어지내야 한다.
그 여성은 지금 세상에서
능력도 없는 사람이라고 사는 것도 싫고
또 이웃 세상에서 아무런 존재 가치도 없는
주체성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결정해야 한다.
그녀 스스로 지금 세상으로 물러섬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이웃 세상으로 나아감을 선택하던지.
주역은 그 여성의 하소연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나의 사는 모습을 잘 보아
나아가거나 물러서야 하겠지요”
[관아생(觀我生) 진퇴(進退)]
그 여성은 어느 길을 선택해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결정해야만 한다.
주역은 ‘나의 인생이 사는 모습을 잘 보라.’
즉 관아생(觀我生)이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나의 인생을 본다’라는 뜻은
‘나는 앞으로 어떠한 모습의 인생을 가꿀 것인가?’
또는 ‘나는 죽기까지 나의 인생을 한 묽음으로 보아
어떠한 모습으로 살 것인가?’를 본다는 의미이다.
즉 인생 전체를 보고
통일성 있고, 또 일관성 있는 삶을 살라는 의미이지만.
이 말은 어렴풋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는 되지만
쉽게 들어오지는 않는 개념일 것이다.
관(觀)을 설명한 같은 괘사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대야에 손을 씻고서도 제사를 올리지 않는다.
이때 믿음성이 있으면 엄숙한 것 같다.’라는 구절이 있다.
[관(觀) 관이불천(盥而不薦) 유부(有孚) 옹약(顒若)]
손을 대야에 정갈하게 씻으면 제사를 올려도 흠잡을 데 없다.
그러나 손을 씻고서도 제사를 올리지 않고 뜸을 들이는 이유는?
믿음성이 있는지 스스로 살펴보는 것이다.
관(觀)은 그냥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황새처럼 높은 데에서 멀리 보고 의사결정을 하라는 뜻이다.
‘잘 보다’의 관(觀)은
‘황새(관, 雚)가 높은 데에서 멀리 보듯(견, 見)’
보라는 의미이다.
믿음성(부, 孚)은 ‘주역으로 본 생각거리 19편’에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란다.
간략히 부(孚)를 요약하면
새란 종족을 번성하게 본능적인 세대를 이어가는 사명감이 있기에
새알을 노리는 위험한 적들에 대항하는 용감성을 갖추어
알을 품을 때 정성을 들이는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와
나아감과 물러섬의 결정 즉 선택은
관아생(觀我生)처럼 ‘내 인생을 전체로 보아
앞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살 것인가’를
그냥 보지 않고 자세히 보라는 뜻이다.
‘자세히 보다’는 관(觀)은
황새처럼 높은 데에서 멀리 보고 결정하라는 뜻이다.
결정할 때 내 마음속에 믿음성이 있는지
즉 사명감, 정성, 두려움을 이기는 용감함이 있는지
살펴보란 뜻이다.
주역은 참으로 현명하다.
그 여성은 진퇴(進退)의 선택을 속 시원하게 결정해 주길 바라지만
주역은 그러한 결정을 하지 않는다.
선택에 따른 책임을 스스로 부담하고
홀로 감내하면서 결정할 그 여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신 주역은 관아생(觀我生)이란 깊은 뜻의 말을 던진다.
관아생(觀我生) 즉
‘앞으로 나의 사는 모습을 잘 그려보라.’라는 구절을
마음의 지표로 삼고 선택을 한다면
그 선택이 혹시 잘못되더라도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왜?
앞으로 벌어질 나의 인생 전체를 자세히 보고
또 앞으로 가꾸어야 할 삶의 가치를 자세히 보고
선택한 것이니까.
설령 잘못되어 고통이 따를지라도
‘운명 탓이겠지’란 든든한 피난처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