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풍도(春風圖) 방에서

by 스테파노

춘풍인가? 그림 제목은 확실치 않다. 여하튼 비슷한 제목의 그림을 오래전 인사동 화랑에서 보았다. 유명한 월전 장우성 화백께서 그리신 그림이다. 나는 처음 그림을 본 순간 마음이 끌리어 자리를 못 떠나고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그때 본 그림을 나에게 그리라면 결코 그릴 수도, 아니 흉내 낼 수도 없겠지만 그림의 모습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밀밭인가 보리밭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봄바람에 일렁거리는 모습에다, 새순이 파릇파릇 난 수양버들 한그루가 역시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림을 더욱 좋아하게 만드는 것은 점으로 콕 찍어 놓은 듯 그려놓은 종달새가 있어서이다. 멀리 밭 한가운데에서 이제 막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오르는 종달새가 있어 그림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 관심 밖이라 잘은 기억에 없으나 저 멀리에는 마을이 있었든 같기도 하고, 없었든 같기도 하고.


그림값이 꽤 비쌀 것 같아 얼마냐고 물어볼 용기가 없어 그냥 인사동에 있는 화랑을 나왔다. 근무하는 직장의 사무실에 와서도 자꾸만 그림 생각이 나서 전화로 가격을 물어보았다. 당시 내가 살던 집값의 1/3에 해당하는 내 수준으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큰돈이었다.


애초에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지레 생각을 해서인지 아쉽지는 않았다. 나는 그날 이후 그냥 내 머릿속에 그림을 넣어 두고 생각날 때마다 그림을 펴놓고 그림 안에 내가 있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나만의 방해받지 않는 상상의 공간, 이른바 춘풍도(春風圖) 방을 마련해 틈만 나면 그리로 피했다.


그리고는 나는 춘풍도 방에서 추사 김정희 선생이 자기 초상화를 보면서 읊조린 자제소조(自題小照)의 글을 생각하며 진정한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찾고 또 찾았다.


여기 있는 나도 나이고, 그림 속의 나도 나다.

여기 있는 나도 좋고, 그림 속의 나도 좋다.

이 나와 저 나 사이에 진정한 나는 없구나.

(중략)

-정민,⌜조선 지식인의 발견⌟에서 추사 김정희의 자제소조(自題小照) 내용 참조


그럴 때마다 언제부터인지 순간이동처럼 나의 모습은 그 그림 속에서 벌렁 누워 있었다. 나는 바람결에 하늘거리는 물오른 수양버들 아래 팔베개를 하고. 일렁거리는 보리밭을 보면서. 쌓인 스트레스로 만신창이가 된 나 자신을 가만히 더듬어 보면서.


그리고는 진정한 나는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갈대처럼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주인의식이 없는 껍데기 삶을 벗어날 수는 없는지. 풋풋하지만 실수도 하지만 자꾸 쪼그라지는 마음을 다잡아 도전하는 삶을 살 수는 없는지 등을.


직장에서 윗사람과 의견이 엇갈려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올라왔을 때도. 부장이 팀원들이 보는 자리에서 팀장인 나를 비방할 때도. 자기의 자리를 넘실거린다는 윗사람의 의심하는 속내 때문에 억압 질을 참아야 할 때도 등등. 나는 그때마다 상상의 춘풍도 방으로 순간이동을 했었다.


또 상상의 춘풍도 방에서는 애써 흠 없는 인간이 되려고 아등바등 삶의 에너지를 전부 털어 쓰는 데에 매달리지 않으려 했다. 과로로 병을 얻어 한직으로 밀려났을 때도 춘풍도 방에서 지나가는 봄바람이려니 하면서 생채기투성이를 싸안는 법을 익히면서. 마치 나무의 옹이처럼 흠 자국을 덧나지 않게 살포시 감싸면서.


또 상상의 춘풍도 방에서는 늦었다고 자신을 후회로 다그치지 않고 느긋한 생활에 젖어들게 했다. 마음에 짐이 되던 후회 거리를 세월 가는 대로 하나씩 하나씩 털어내면서.


나는 오늘도 춘풍도 방에서 사색을 즐긴다. 이제 나는 스트레스에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그 방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풋풋하지만 도전하는 30세대의 삶을 닮겠다는 야무진 목표로 그 방을 이용한다. 비록 자신을 역주행시키려는 욕심일지라도. 창조적인 인간이 되는 꿈을 꾸면서.


상상의 춘풍도 방은 열린 공간이어서 좋다. 모든 사색이 시류에 따라 변하고 또 흘러가도 언제나 봄 내음을 맡아 새로운 이면을 볼 수 있게 한다. 계절이 어떻게 변할지라도 춘풍도 방에서는 선선한 봄바람이 분다. 나는 글쓰기 목표를 느지막한 나이에 새로 시작했다. 나는 이런 봄 내음과 봄바람의 신선한 기운으로 글쓰기 공모전에 오늘도 응모하려 한다.


이제는 상상의 춘풍도 방에서는 사물을 낙관적으로 보기에 언제나 즐겁다. 모호함이 판을 치더라도 이를 감수하려는 마음에 용기가 난다. 처음에는 어색함도 있었으나 20여 년 넘게 상상의 춘풍도 방을 들락거렸기에 그 방을 이용하는 데 아주 익숙하다.


다만 나는 사색에 빠졌다가 단잠이 들 때 깨어있으라고 시끄럽게 울어대는 그림 속의 종다리 때문에 잠이 스르르 사라지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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