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구석

by 스테파노

직장에서 오래 알고 지내는 K 선배가 있었다. 선배는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해박하고 항상 번득인다. 또 일마다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등 무결점을 자랑한다. 그러다 보니 K 선배가 술자리, 식사 자리를 청해도 그 앞에서는 모두 주눅이 들어 주변의 동료나 후배들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멀리하곤 했다.


K 선배는 더욱이 잘난 테를 드러내지 않으면 그래도 주변에 사람이 붙어있을 텐데, 기어이 잘난 모습을 과시하여 주위 사람들의 얼굴을 늘 찌푸리게 했다. K 선배는 직장의 00 부서에서 같은 라인으로 오래 근무했던 나를 포함한 후배들과 비교적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1년에 두 번 정도는 정기적인 모임이 있을 정도로.


00 부서에 근무했던 후배들은 이미 K 선배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농담을 빙자하여 싫은 소리, 뼈아픈 소리 등을 건네기도 한다. “Perfect K 선배님, Stupid 후배의 술 한잔 받으시죠.” 이런 식으로 운을 뗀다. 그리고는 “K 선배처럼 독야청청 살면 Stupid 후배도 좋아할 내 좋아할 수 없지요, 좀 보통 사람처럼 엉게 덩게 살아요.”라고 후배들은 실실 골리면서.


그날도 00 부서에서 같이 근무하였던 멤버들과의 정기적인 모임이 있어서 술자리가 벌어졌다. 술자리가 웬만큼 무르익었을 때 K 선배는 후배들을 붙잡고 울 듯이 하소연했다. “외롭다”라고. 후배들은 선배의 “외롭다”란 말을 단순히 그냥 나온 말이 아님을 알았다. 적어도 K 선배와 오랫동안 같은 부서에서 근무했고 이후 틈틈이 모임에서 보아왔던 사람들의 감각으로는.


왜냐하면, K 선배는 결코 자기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인데 무너져 허술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K 선배의 이 말은 “오늘 외로우니 술 파트너가 되어달라.”란 뜻이 아니다. K 선배는 “매일매일 외로워 죽을 것 같으니 어떻게 하면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처방을 얘기해 달라.”는 긴급한 목소리였다.


의외였다. 무쇠처럼 평소에 강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다니. K 선배의 연약한 모습을 보고 후배들은 안쓰럽게 생각했다. 여러 후배는 나름대로 한 마디씩 처방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말들을 했다. 말 서두에 “선배는 듣기 거북하겠지만” 등의 꼭 쓰지 않아도 될 말을 넣어가면서.


“잘난 테를 너무 내니 자중하는 모습과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완벽주의 성격이 외롭게 만든다.”, “허술한 면이 없어 사람들이 접근하기를 꺼린다.”, “핀잔을 맞을까 봐 주위에 사람이 없다.” 등 여러 말이 나왔다.



그날 후배들이 말한 내용을 마지막으로 핵심만 요약해서 나와 몇몇 후배는 이런 뜻으로 얘기했다.

첫째, 일부러 허술한 빈구석을 만들어 남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둘째, 사람들이 빈구석을 메꾸러 다가올 때 고마워하면서 흔쾌히 인정하고 받아주어야 한다.

셋째, 빈구석을 ‘내가 메꾸었지’하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들을 껄껄거리며 환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후배들은 모두 K 선배의 성격을 보아 세 가지 다 어려우니 외로움의 해결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K 선배는 00 부서에서 5년 넘게 같이 근무하여 정이 들었던 가까운 후배들의 말은 비교적 잘 듣는 편이었다. 후배들은 그날 모임이 끝난 뒤 1~2개월 동안은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선배의 태도가 변했을까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여러 후배는 “변한 것도 없이 평소대로 그 모양 그 타령”이라는 말들을 해댔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후배들은 바쁘기도 하고 또 근무하는 부서도 각각 흩어져 있어 선배에 관한 관심은 스멀스멀 사라지었다.


나는 6개월쯤 지나 술집에서 우연히 그 선배를 볼 수 있었다. K 선배는 입사 동기들과 모여 술자리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K 선배 일행과는 가림막을 사이에 두고 두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있었다.


나는 고향 친구들과 같이 있었기 때문에 K 선배는 내가 술집에 있었던 사실을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K 선배 테이블의 화제가 무엇인지를 대충은 알 수 있었다.


“K, 이 친구, 잘 나고 똑똑한 줄만 알았더니 헛똑똑이지 무어냐?, 글쎄, 며칠 전 만났더니 머리를 싸매고 고민 중이라고 하더군, 내가 보기엔 고민거리도 아닌데, 글쎄, 업무상 필요하여 00 회사의 사람을 소개받아야 하는 데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 내가 흔쾌히 소개해주었지. 그랬더니 고맙다고 오늘 술을 산다지 않는가? 오늘은 K, 이 친구가 사지만 나도 한몫했지, 안 그러냐?”


K 선배는 "그럼! H, 이 친구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나로서는 정말 곤란했지, 여러 동기가 알다시피 내가 성질이 못되어서 사람들 사귀는 데는 젬병인 것을, 다들 알잖나, 동기들, 앞으로 그런 일이 있을 때 부탁함세, 사실 나는 많은 면에서 허술하지만 허술한 점을 감추려고 잘난 척을 하지, 가까운 동기생들이니 이해해주게, 종종 이런 자리를 가졌으면 하네."


참으로 놀랍다. 부러지면 부러지지, 절대로 굽히지 않는 K 선배가 변했다. 나는 그날의 빈구석에 관한 내용 즉, 일부러 빈구석을 만들어 보여주고, 빈구석을 메꾸러 다가올 때 받아주고, 빈구석을 메꾸었다고 떠벌리는 사람을 환대하는 세 가지 점을 완벽하게 해내는 K 선배를 보다니, 아니 정말 보았다. 나는 충격을 넘어서 오만스러운 K 선배가 갑자기 큰 사람으로 보였다. 대단한 위인처럼.


나와 후배들은 K 선배에게 외로움에 대한 대안으로 빈구석을 내 걸었으나 그냥 말장난 같은 헤픈 어휘를 던진 것에 불과하였다. 어차피 K 선배로서는 안 될 것이 뻔히 보였기에. 그러나 K 선배는 해내었다. 그것도 멋들어지게.


나도 외롭다. K 선배만큼 외롭다. 나는 허술한 빈구석 천지이다. K 선배보다도 쌓아놓은 지식도, 주변을 엽렵하게 살피지도, 아귀가 딱딱 맞게 일 처리하는 능력도 없다.


그래, 나도 지금-여기서(now & here)부터 변해야겠다. K 선배처럼. 나도 허술한 빈구석을 떠벌려야겠다.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자존심이 꼭꼭 틀어막고 있는 빈구석을. 나도 허점 많은 나의 빈구석을 메꾸러 다가오는 정겨운 사람을 기다려야겠다. 그렇게 만난 사람과 진정 외로움을 나누고 달래면서 척하는 삶을 벗어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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