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디 1
매스 미디어론을 강의하시던 최 00 교수님이 뜬금없이 “종교를 가진 사람이 몇 명인가?”라고 물으셨다. 강의에 출석한 스물넷 학생 중 3명인가가 손을 들었다.
교수님은 또 “종교를 두고 지금 고민하는 사람은?”하고 물으셨다. 손든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는 교수님은 지나가는 말로 “나이 스물을 넘겼으면 종교는 무엇인가 한 번쯤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하고는 수업 진도를 맞추기 위한 강의를 계속했다.
마디 2
교수님이 종교를 언급한 강의가 떠오른 것은 그로부터 8년이 지나서이다.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은 의식 세계 속에 그날의 강의실 상황이 선명히 그려졌다.
아마도 나는 계속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잠재의식 속에 종교란 주제를 두고. 감수성이 예민했던 푸릇푸릇한 시절에는 기왕에 얻은 정보를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종교’에 관한 기억이 어느 날 불현듯 나타나니 놀라기도 했지만.
여하튼 나는 그해 봄 카돌릭에 들어갔다. 예비신자를 한 6개월을 하고 크리스마스 오기 전 영세받았다.
마디 3
직장과 가까이에 있는 명동 성당에서 예비자 교리를 받고 있을 때였다. 교육을 담당하던 수녀님께서 ‘여러분은 가톨릭에 왜 오게 되었나요?’하고 물었다.
젊은 층과 장년층이 뒤섞인 예비신자 7~80여 명은 나름대로 대답했다. ‘영생을 위해’, ‘의지할 곳을 찾아서’ 등 대답은 각양각색으로 나왔다.
수녀님은 ‘여러분의 대답은 모두 훌륭합니다. 여러분이 무슨 이유로 왔든 또는 어떻게 해서 왔든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리에 여러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누군가가 ‘수녀님은 왜 가톨릭에 들어갔나요?’라고 물었다. 수녀님은 ‘저는 잘 죽기 위해서 들어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잘 죽기 위해서?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28살의 젊은 나는 ‘잘 죽기 위해서’를 두고 생각에 몰두하였다. 지금도 나는 종종 나에게 질문을 한다. ‘잘 죽기 위해서’ 나는 지금 하루하루를 잘 살아 내고 있는가?
내가 아는 내 연배의 사람도 유서를 써놓고 미래에 닥칠 죽음을 초연하게 마주하면서 하루하루를 기쁘게 산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죽음을 직접 마주하기가 겁나 하루하루를 아등바등 사는데? ‘잘 죽기 위해서’란 화두를 붙잡고 오늘도 고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