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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치 Feb 21. 2024

TRUTH : 듣기 편한 것은 알기도 쉽다

by The Square (1987)


 2023년에 가족 여행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코로나 이후 정말 오랜만에 들린 일본은 왜인지 모르게 한국처럼 느껴졌다. 실제로도 한국인들이 많았고, 거리에도 어디에도 한국어 간판과 메뉴판이 즐비한 탓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일본인들이 한국인 같이 보이고, 한국인들이 일본인처럼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아무래도 넷플릭스, 유튜브나 SNS 등의 영향으로 두 나라 국민들의 옷차림이나 스타일이 비슷해진 탓이 있지 않나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광지를 살짝 비껴 난 외진 골목, 혹은 서점에 들어갔을 때 ‘역시 일본은 일본이구나’를 생각하게 되었다.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많은 노포들, 크고 작은 다양한 콘텐츠가 즐비한 그 현장을 보고 있노라면 일본의 문화적 잠재력을 동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처음 일본에 간 것은 2005년 즈음이었다. 막 대학에 입학한 나는 같은 대학을 다니고 있던 사촌 형과 둘이서 도쿄로 여행을 떠났었다. 부모님 없이 처음 떠나보는 먼 여정이었다. 그때 만난 일본은 문자 그대로 ‘신세계’였다. 지금과는 달리 그때의 일본은 한국과 모든 면에서 다른 차원의 나라였다. 오다이바에서도, 하라주쿠에서도 이국적인 사람과 풍경들이 가득했다. 보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우리를 압도했다. 함께 갔던 사촌 형은 지하철의 사람들을 보며 ‘사람 구경만 해도 시간이 잘 간다’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던 곳은 단연 시부야 HMV와 타워레코드였다. ‘시부야계’ 혹은 ‘시부야케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역사의 현장으로만 막연히 알고 있던 그 매장 앞에서 나는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건물 하나씩이 통째로 음반 매장이었던 것이다. 층층이 일목요연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음반들을 뒤져보니, 양도 양이지만 그 다양함에 입이 떡 벌어졌다. 인디 음악부터 클래식, 재즈에 월드 뮤직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왔으니 뭘 사긴 사야 하는데, 같이 간 사촌형에게 민망할 정도로 시간을 써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장고 끝에 산 앨범들 중에 THE SQUARE의 <TRUTH>가 있었다.


 우리 세대, 악기 좀 친다 하는 사람들은 J퓨전, 즉 일본 퓨전재즈의 그늘 아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타 치는 녀석들은 카시오페아 vs 티스퀘어 떡밥을 가지고 말싸움을 했고, 드럼 치는 녀석들은 아키라 짐보의 무슨 곡을 다 땄노라 자랑을 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음악을 들어온 내가, 처음으로 방문한 일본 레코드 샵에서 J퓨전의 명반을 사들고 온 것은 사뭇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일본에 다녀온 뒤로 나는 줄곧 <TRUTH>를 꺼내 들었다. 편하게 틀 수 있는 앨범이었다. 듣는 이의 취향을 잘 타지 않기에 술자리 BGM으로도 틀었고, 교양수업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도 틀었다. 첫 퇴직 후 혼자 떠난 전국여행에도 가져갔다. 이 음반을 들으며 강경역에서 화산성당으로 무작정 걸었던 기억도 난다. 정말 아무 때고 들었다.

 

 앨범을 플레이어에 걸면 마치 다가오는 듯 첫 곡 <Grand Prix>가 시작되었다. 쫀쫀한 베이스와 적당히 눌려서 어택이 살아있는 드럼을 배경으로 색소폰이 터져 나왔다. 그러면 나머지 곡들을 듣는 일은 일은 순식간이었다. 동명의 타이틀곡이자 최대 히트곡 <Truth>를 지나면, <Beat in Beat>, <Giant Side Steps> 등 준수한 완성도의 수록곡들이 이어진다. 다분히 대중적인 멜로디를 듣다 보면 ‘이거 어디서 들어봤는데?’ 싶은 멜로디도 더러 이어진다. 그건 나 말고도 다른 많은 이들이 티스퀘어의 음악을 쉬이 틀어왔기 때문이겠다. 그만큼 쉬운 음악이었다.


 퓨전재즈의 ‘퓨전’이란 단어를 따긴 했지만, 사실 본토 미국의 퓨전재즈와 J퓨전 간의 간극은 상당하다. 재즈라기보다는 팝, 기교적이고 스타일리시한 연주곡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J퓨전이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장르가 된 것은 ‘곡’이 아니라 ‘노래’가 들리는 음악이기 때문이리라. 그런 탓에 <TRUTH> 역시도, 재즈라기보다는 색소폰이 있는 대중가요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앨범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곡 <Twilight in Upper West> 같은 곡들을 들어보면, 멜로디 그대로 가사를 붙여 불렀어도 히트를 했을 거란 생각도 든다.

 이런 대중성이 옛적 평론가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J퓨전을 재즈가 아니라 경음악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혹평하는 글도 본 적이 있다. 팝에 재즈를 입히거나 재즈에 팝을 입혀 좋은 음악이 나왔다는 것에 화가 난 듯이 말이다. 그들은 무슨 권리로 쉬운 음악은 나쁜 음악이라 말했던 것일까? 나는 그저 J퓨전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허용한 일본의 씬이 부럽게만 느껴졌다.


 아무려면 어떠랴. 구관이 명관이다. 이 글을 쓴다고 오래간만에 튼 <TRUTH>는 들으면 들을수록 훌륭한 앨범이었다. ‘재즈’가 어쩌고 어떻고 왈가왈부하려 했던 당초의 작정을 잊어버린다. 듣기 편한 것은 알기도 쉽다. 알면 들리고 들리면 울린다. 전성기 이토 타케시의 연주가 여전히 나를 울리니 이것이 레코드의 힘인가 싶다.

 다만 그 시절 시부야 HMV에 더는 가볼 수 없게 되어 아쉬울 따름이다. 아직 타워 레코드가 건재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레코드를 판매하는 레코드샵이 레코드되지 못하는 세상이 조금 야속하다.


Release Date  April 1, 1987

Duration  42:45

Recording Date December, 1986 - January, 1987

Recording Location CBS Sony Shinanomachi Studios, Tokyo, Japan


===


    소위 시티팝(어디서 튀어나온 단어인지는 모르겠지만)이라는 장르의 근간에도 J퓨전이 있다.  

    본작의 색소폰을 담당한 이토 타케시는 1990년에 나온  앨범 이후 잠시 T-Square를 떠나게 된다. 이때 색소폰의 빈자리를 채운 이가 바로 혼다 마사토. 그의 참여가 전화위복이 되어 T-Sqaure의 최전성기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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