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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치 Apr 03. 2024

사랑하기 때문에 : 한 장의 발자국

by 유재하 (1987)

 대학 시절, 나의 모교 노천 극장 근처를 지나다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의 현수막을 본 기억이 있다. 유재하라는 이름은 어렴풋이 들어보았는데, 그를 위한 음악 경연대회가 있는 것은 몰랐다. 알고 보니 그는 나와 같은 학교의 작곡과를 다닌 타과 선배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잠깐의 흥미 이후 유재하라는 이름은 다시 내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버렸다.


 그 뒤 나는 군대에 갔고, 2년 뒤 학교를 잠깐 다니다 휴학을 해버리고 레코딩 엔지니어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화성학과 시창 수업도 신청해 비전공자의 한계를 극복하려 안간힘을 썼다.


 하루는, 화성학 수업을 위해 받은 리드 시트의 위쪽에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제목과 ‘유재하’라는 이름 석자가 떡하니 적혀 있었다. 모르는 것 투성이었던 수업에서 만난 군대 이전의 기억. 저 멀리 사라진 것만 같았던 반가운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수업을 통해, 나는 유재하의 음악을 음원으로서가 아니라 강의 주제로서 처음 만났다. 화성학 시간에 피아노 연주곡으로 울려 퍼진 <사랑하기 때문에>가 내 고막을 울린 첫 번째 <사랑하기 때문에>였다. 어딘가 억울한 일인 듯도 했지만 그것은 또 그것대로 운치가 있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대중가요로서 <사랑하기 때문에>의 화성학적인 성취가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그 음악에 단박에 매료되었다.


 1987년. 이 앨범은 내가 태어난 지 1년 뒤에 발매되었다. 나는 성인이 되고도 한참 뒤에야 이 음반을 처음 찾아들었다. 향년 스물다섯에 하늘로 가버린 청년의 음악을 20여 년 뒤 20대 중반의 내가 만나다니! 심지어 내 생일과 발매일 간의 차이도 딱 4일이었다. 혼자 일기장에 적어 놓고 싶은 재미있는 우연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부끄러웠다. 나와 같은 나이에 이토록 빛났던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는 걸까?


 첫 회사를 그만두고 한동안은 이 앨범을 듣다가 <가리워진 길>을 몇 번씩 반복해 듣는 습관이 있었다. 내일이 불투명했던 시절. 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는,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적막하고 깜깜한 방안에 울려 퍼지는 유재하의 어눌한 목소리는 나에게 무엇보다도 큰 울림이었다.


 근자에 이르러 옛 노래들이 재평가되며 유재하의 곡들도 곧잘 커버되고 있다. 하지만 유재하의 노래들을 잘 부르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의 노래를 김현식도 불렀고 조용필도 불렀으나, 가객과 가왕보다도 더 훌륭하게 유재하의 곡을 소화한 이는 결국 유재하 자신이었다. 유재하의 음악, 유재하의 목소리에 담긴 재현 불가능한 오리지널리티. 그것이 담긴 음반이 오직 이 <사랑하기 때문에> 뿐이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다. 이 한 장의 음반을 통해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7분 정도다.


 언젠가 7살 딸아이에게도 <사랑하기 때문에> CD를 들려주었다. 그때 나는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이 25살에 안타깝게 죽었다고, 이제는 이 음악으로 밖에 만날 수 없다고도 알려주었다. 그러자 딸아이가 25살이면 너무 젊은데?라고 말해 아내와 나를 뒤집어지게 만들었다. 7살짜리 꼬마가 요절했다고 말하는 나이 만 25세.

 가끔은 그를 데려간 하느님에게 정말 너무했다고 원망이라도 하고 싶다. 발자국을 아무리 크게 남겼기로서니 가는 길도 그렇게 빨랐어야 했나 싶다.


Release Date   August 20, 1987

Recording Location Seoul Studio (Seoul, Repub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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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기 때문에>은 판본이 많은 편이다. 리마스터도 3번이나 거쳤다. 혹자는 판본마다 음질과 편집이 다르다고도 하는데, 필자가 직접 확인해 본 적은 없다. 혹시 음반 하나 만을 남기고 떠난 뮤지션을 추억하는 방법 중 하나는 아닐까?라고도 생각해 본다.  

본문에도 언급했지만 유재하는 다른 가수들에게도 더러 곡을 주었다. 흥미가 있다면 김현식의 <가리워진 길>, 이문세의 <그대와 영원히> 등을 들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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