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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치 Mar 27. 2024

서울불바다 : 금기를 깨고 멘 총대

by 밤섬해적단 (2010)


 그날 나는 몸이 무척 좋지 않았다. 아침부터 감기 기운이 있었고, 5시에 클럽에 출근하여 공연 준비를 하다 보니 한기가 들고 어질어질했다. 전날에는 외국인 파티를 했고, 그 밤에는 밤새도록 기획 공연을 진행해야만 했다. 홍대 앞 모 라이브 클럽에서 일한 지 수개월만에 내 몸에 나타난 가역반응이었다.


 홍대 라이브 클럽의 주말 밤은 길고 길었다. 금요일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 혹은 그 너머의 시간까지도 공연이 이어졌다. 극한의 소음과 취기에 긴 시간 노출되는 일은, 더러 즐거웠지만 때로 고통스러웠다. 리허설을 진행하는 동안 타이레놀을 몇 알인가 삼켰던 것 같다. 어떻게든 버텨내리라…는 개뿔. 내 몸은 계속해서 지쳐갔다. 저녁 9시를 넘은 시점에서 나는 이미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귀는 잘 들리지 않았고 담배연기에 목구멍이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


 문득, 내 앞에 놓인 16채널짜리 싸구려 믹서를 보았다. 그 클럽에서 몇 년인가를 마구 굴려진 아날로그 콘솔이었다. 몇 채널인가가 듬성듬성 노브가 빠진 처량한 모습. 무대 위 밴드의 연주를 받아내느라 끝까지 치고 올라간 레벨 미터를 보며 흡사 콘솔이 내지르는 비명 같다고 생각했다. 고장 난 믹서는 고쳐지는 대신 쓸모를 다할 때까지 소모될 것이고, 기능하지 못하는 그 순간 아무렇지 않게 버려질 것이다. 가만, 그건 내 얘기잖아?

 결국 자정을 넘을 무렵, 정신이 혼미해졌다. 콘솔 데스크에 이마를 박고 엎드려버렸다. 바에서 술을 타던 친구가 건너와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고 내 어깨를 흔들었다. 나는 들었으되 듣지 않았다. 사장이 보건 말건 에라 모르겠다였다.


 밤섬해적단이 무대에 오른 건 바로 그때 즈음이었다. 쓰러진 내가 마이크를 열건 말건 그들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시끄러운 드럼과 퍼즈 베이스가 울려 퍼지며 보컬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고래고래 괴성을 내뱉었다. 아 시작했구나 하고 고개를 들었다.

 내 눈에 펼쳐진 풍경은 기괴했다. 웃통을 깐 맨몸의 베이시스트가 머리에는 하이바를 뒤집어쓰고 마이크를 집어삼킬 듯 광기를 발하고 있었다. 드러머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채 벌써부터 땀을 뻘뻘 흘리며 드럼을 문자 그대로 ‘때려 부수고’ 있었다. 무대를 채운 멤버는 오로지 그 둘 뿐이었다. 그러더니 한 곡이 끝났다.


 액티브 엑스(Active X). 그것이 첫 곡의 제목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갑작스레 만난 멋진 밴드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자세를 바로 하였다. 그리고 헤드폰을 썼다 벗었다 콘솔을 만지며 좋은 소리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이내 나는 그것이 무의미한 일임을 깨달았다. 밴드의 음악은 이미 클럽의 시스템이 담아낼 수 없는 어떤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마이크를 키우던 줄이던, 스네어를 풀던 조이던, 나는 그들이 내는 소리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나는 그냥 콘솔을 버리고 객석으로 내려와 관객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이어지는 밤섬해적단의 공연은 충격과 공포의 연속이었다. ‘그로울링이다 무섭지!’라고 제목을 읊조리더니 다음 순간 괴물의 언어로 포효하는 곡들이 반복되었다. ‘쓰러져 뒈질 때까지 X나 일하자!’라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내 몸의 아픈 기운도 사라졌다. 카타르시스의 뜻이 ‘배설’이라고 했던가. 그날 내 안에서 무언가가 정말 배설되듯 날아갔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살롱 바다비’에서 열린 레코드 폐허(레코드 페어가 아니다)에서 이 <서울불바다>를 발견하고 냉큼 집어 들었다. 당시 '비싼트로피'의 박정근 대표가 직접 앨범을 팔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앨범을 사는 나에게 엄지를 치켜들며 감사하다 말했던 것 같다. 일련의 힘든 시간들이 지나고 지금은 비싼트로피도, 살롱 바다비도 내 기억 속에만 남아있다.


 다시 한참 뒤 어느 날, 친한 동생의 소개로 밤섬해적단의 드러머 권용만 씨와 술자리를 같이 했다. 그는 당시 ‘시네마지옥’이라는, 컬트 영화 상영 모임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나와 취향이 겹치는 부분이 있어 주로 영화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물론 밤섬해적단 음악에 대한 추억과 감사도 전했다. 그런데 대뜸 그가 나에게 “예술 좋아하시는군요.”라며 웃어 보였다. 그는 내 찬사가 싫었던 것이다. 또한 내가 좋아하던 일반적으로 ‘B급’이라 칭해지던 영화들도 싫었던 것이다. 남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배척하고, 과감히 금기를 건드리던 밤섬해적단의 음악이 살짝 엿보이는 듯했다.


 많은 사람들이 밤섬해적단을 좋아했을 것이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밤섬해적단을 싫어했을 것이다. 앨범에 담긴 정치적인 메시지와 과격함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한 껄끄러움을 일으키는 것이 밤섬해적단이 탄생한 이유라고 조심스레 추측한다. 그 음악들은 무슨 고차원적인 선동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사회에 여전히 ‘하지 말라는 것’이 있으니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태어난, 어쩌면 꼭 밤섬해적단이 아니었어도 누군가는 해야 했을 음악일 것이다. 금기를 깨고 멘 그 총대에 대해서 이제는 평가해 주어야지 않을까? 그러나 밤섬해적단 그들은 내 이런 글도 싫어할 것 같다.


 여의도를 이루기 위해 밤섬을 폭파한 일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그 사건은 의도적으로 잊혔다기보다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아 잊힌 것이다. 밤섬해적단의 음악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음악이 나왔을 때, 그들에 대한 영화가 나왔을 때도 무슨 큰일이 날 것처럼 소동을 부리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 일들도 시간이 지나 보니 밤섬 폭파작전처럼 잊혀가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가 눈을 돌린 사이, 망가진 것만 같던 밤섬에는 들꽃이 피고 새가 날아들고 있다. 밤섬해적단이 지나간 우리 인디 씬에도 그러한 봄이 찾아오리라 믿는다.


Release Date  July, 2010

Duration  51:09

Recording Location 밤섬해적단 합주실, Fireball Studio


===


앨범 속지 마지막 장의 ‘사과 말씀’이 인상적 이서 한 부분 옮겨 적는다. ‘전 트랙에 걸쳐 볼륨이 평등하지 못함. 이는 한국사회의 불평등을 표현하려는 (청자를 불편케 하는) 음악적인 시도임’

본문에서 언급한 대로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라는 동명의 영화가 나와있다. 이 쪽은 다큐멘터리로, 밤섬해적단의 음악과 속칭 ‘박정근 사건’을 다룬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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