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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치 Apr 10. 2024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라흐마니노프

by 리흐테르 / 카라얀 (1959,1963,2002)


 그날 내가 왜 퍼플레코드에 갔었는지 모르겠다. 분명 이 앨범 때문은 아니었으나, 음반들을 둘러보던 내 눈에 자꾸 이 녀석이 밟혔다. 이상하게도 다른 CD들 사이에서 유독 혼자만 조금 튀어나와 있었던 것이다. 나의 경우 그런 식으로 살짝 삐져나온 앨범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누군가 꺼내어 본 흔적이 있다는 것은 좋은 싸인이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클래식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나에게도 친숙한, 리흐테르와 카라얀의 이름이 보였다. 도이치 그라모폰 (역시 친숙한 이름) 특유의 쨍하디 노란 바탕의 글상자 위에 찍힌 타이틀은 ’TCHAIKOVSKY’. 거기까지 확인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정도는 한 장 가지고 있어도 좋겠지. 하고서 뒷면의 트랙 리스트를 보니 오호라. 1번부터 3번 트랙까지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자리하고 있었다. 차이코프스키를 사면 라흐마니노프를 끼워준다고?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나는 냉큼 앨범을 뽑아 계산대로 향했다.


 아마 4번에서 6번 트랙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을 먼저 들었던 것 같다. 플레이어가 돌자 누구나 들으면 알 법한 1악장의 도입부가 ‘빰빰빰빰’ 하고 흘러나왔다. 그래 이거지. 순식간에 빠져들게 만드는 마력을 가진 연주였다. 그 음률과 화성 속에서 나는 본 적도 없는 러시아의 어느 벌판 위에 서 있었다. 초겨울 삭풍이 불어오고, 한기를 느낀 나는 불 켜진 어느 성채로 들어가 벽난로 앞에 앉는다. 창 밖의 바람소리가 현악기와 관악기가 되고, 바알간 불꽃의 온기가 피아노 되어 나를 감싸 안았다. 딱 3분까지만.

 3분이 넘어가자 별안간 모든 소리가 잦아들었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쪼그라져 버렸다. 음악이 사라지자 나는 문득 깨어나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다시 러시아 성채나 혹은 오두막에라도 들어가고자 플레이어의 볼륨을 마구 높였다. 악기 소리가 조금씩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다 어떤 부분에선가 너무 큰 소리가 울려 나는 다시 볼륨을 낮추었다. 그러면 이번엔 모든 악기 소리가 침묵 속에 숨어버렸다. 아, 이 앨범은 극단적으로 자연스러운 다이나믹 레인지 추구하고 있구나. 작은 소리는 너무 작고 큰 소리는 너무나 컸다. 작은 소리에 맞추어 볼륨을 키우면 큰 부분이 감당이 안되고, 큰 부분에 맞추어 볼륨을 내리면 작은 부분이 안 들리게 되었다. 또 볼륨 문제는 그렇다 쳐도,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컴포넌트 오디오로는 이 음악의 작은 부분과 큰 부분이 지닌 섬세함을 온전히 재생하기 어려웠다. 좁은 원룸에 구겨져 살던 환경은 덤이었다. 그렇다고 헤드폰을 쓰기는 싫었으니, 나는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재생을 보류하고, 1번 트랙의 라흐마니노프를 만나러 가야 했다.


 라흐마니노프 그의 이름을 처음 접했던 것은 옛날 영화 <샤인>을 통해서였다. 극 중 주인공인 데이비드 헬프갓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목표로 부모와 스승으로부터 모진 채찍질을 당하고, 결국 성공적인 연주 이후 완전히 무너져버린다. <위플래시> 이전의 <위플래시>라 할만한 이 영화를 먼저 본 덕분에, 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에서도 영화 <샤인>에서 느낀 것과 비슷한 광기와 아름다움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리고 돌아온 1번 트랙의 1악장, 이어지는 2번과 3번 트랙의 2악장과 3악장은 내 이런 기대에 완벽히 부합했다. 오히려 그 이상이었다. 특히 2악장의 후반부를 듣는 순간, 내 마음속에 남아있던 ‘라흐마니노프 = 샤인’의 등식이 산산이 부서짐을 느꼈다. 그 자리에는 리흐테르라는 이름이 슬쩍 들어와 똬리를 틀었다. 


 라흐마니노프는 한 때 극심한 신경쇠약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이 전에 발표한 피아노 협주곡 1번과 교향곡 1번이 평단의 혹평을 받은 것이 원인이었는데, 그런 노이로제의 상태를 가까스로 극복하고 처음 만들어진 곡이 바로 이 피아노 협주곡 2번인 것이다. 2악장을 가장 먼저 작곡하고 3악장과 1악장의 순으로 완성해 나갔다 전해진다. 그런 역사가 서린 곡이어서 그런지, 나 역시도 큰 슬픔이나 피로를 겪은 날이면 곧 잘 이 음반을 꺼내 들었다. 음악이야 말로 세상이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는데, 나에게 있어서 이 음반에 실린 라흐마니노프의 음악과 리흐테르의 연주는 마약은 아니어도 약이 되는 음악이었다.


 어느덧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도 집에 제법 큰 스피커를 놓을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이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의 1악장의 3분 이후는 물론이거니와, 차분하고 전원적인 2악장도 만족스럽게 들을 수가 있게 되었다. 그 스피커로 클래식FM을 듣기도 하는데, 청취자들로부터 가장 자주 신청되는 곡이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인 바람에, 가끔은 내가 CD를 듣고 있는지 라디오를 듣고 있는지 헷갈리기도 한다. 그래도 좋다. 질리고 질릴 대로 들은 협주곡들이지만 듣다 보면 또 새로웁다. 그럴 때면 나는 다시 라디오를 끄고 리흐테르와 카라얀의 이 앨범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Duration  71:00

Release Date  1959 (Rachmaninov) / 1963 (Tchaikovsky) / 2002


===


     이 음반은 2002년 유니버설 라이센스로 기획한 ‘이 한 장의 명반’ 시리즈 중 하나다. ‘이 한 장의 명반’은 고 안동림 교수의 클래식 추천서 제목이기도 한데, 이러한 종류의 교양서 중에서도 명저로 꼽힌다. 엄청 두껍지만 관심이 생긴다면 읽어보도록 하자.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Sviatoslav Richter’라 표기된다. 그런데 유독 앨범 표지 상에서는 ‘Svjatoslav Richter’라고 적혀 있는 점이 흥미롭다. 심지어 이 앨범 속지와 뒷면에도 ‘Sviatoslav’로 크레딧이 쓰여져 있는데 말이다. 한국에서 리흐테르를 부를 때도, 부른 사람마다 [리히테르], [리히터], [스비아토슬라프] 등 발음과 표기가 상이하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혼란스럽다가도 재미있다.   

     본래 차이코프스키는 스승의 동생이자 자신의 은인이자 당대 영향력 있는 피아니스트였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게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헌정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니콜라이는 초고를 들고 온 차이코프스키에게 혹독한 비판과 잔소리를 퍼부었다. 심하게 상심한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을 독일의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 한스 폰 뷜로우에게 헌정해 버린다. 이후 니콜라이는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진가를 알아차리고 태도를 바꿔 이 곡을 적극적으로 홍보했고 차이코프스키와는 사과를 했다는 훈훈한(?) 뒷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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