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내내 여행 중 첫 일과는 병원진료였다. 오전 촬영은 접고 가능한 숙소에서 푹 쉬다가 오후에 밖으로 나왔다. Zona Rosa로 가는 길. 드디어 지하철을 타 보기로 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틈에 섞여 그들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이 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하철 이용은 예전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그때그때 티켓을 구입해서 타면 됐다. 5페소를 내고 uno를 외치면 티켓 하나를 밀듯이 던져준다. Doctores 전철역에서 그렇게 처음으로 지하철 티켓 하나를 구매했다. 이들의 지하철은 꽤 짧은 텀으로 자주 운행되고 있었다. 지하철의 맨 앞 두 칸은 여성 전용칸이다. 여성들은 남성들 칸으로 들어와 승차할 수 있지만 남성들은 여성칸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아주 간혹 연인이나 부부 같은 커플들이 보이긴 했다. 여성칸은 핑크 색깔로 내 외장이 단장되어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지하철 티켓의 가격은 5페소. 지금의 환율로 따지면 3백원이 안된다. 저렴하니까 굳이 정기권 이런 게 필요 없었나 보다. 이 못 사는 나라에서 겨우 차비 300원으로 이 거대한 대중교통 시스템을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까? 이보다 5배 이상 받는 우리나라도 대중교통들이 만성적자에 허덕거리는데 말이다. 물론 단편적인 감상 일지 모르지만 멕시코 여행을 계속할수록 멕시코라는 국가가 그들 국민을 대하는 자세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런 감상의 첫 단초가 되었던 것이 지하철 요금이었다. Zona Rosa에서 볼 일을 보고, 한국인이 하는 Ramen House에서 식사를 한 다음 나는 멕시코시티의 두 가지 랜드마크를 방문했다. 첫 번째는 Biblioteca Vasconcelos 였고 두 번째는 멕시코 혁명기념비였다.
Vasconcelos 도서관. 카메라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휴대폰 촬영은 가능하다. 공중으로 돌출되어 나온 서가들이 인상적이다.
마치 SF영화 속 한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듯. 이곳에서 누군가는 평생 가슴에 새겨질 추억을 만들어 갈 것이다.
도서관 한 복판에 공룡 모형이 걸려 있다. 22세기쯤에 미리 와 있는 듯한 건축물 안에 수십만 년 전 공룡이 있었다. 도서관은 인류가 인지하는 모든 시간이 스며들어 있는 곳이니.
도서관 한쪽 그늘에서 Kpop 댄스를 연습하던 동네 여자애들
이들에게 도서관은 쉼터다. 멕시코가 교육에 쏟는 열정은 단지 이곳 도서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Vasconcelos 도서관은 나를 어느 SF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이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공중으로 돌출되어 켜켜이 튀어나온 서가들의 모습은 어느 각도, 어느 위치에서 바라보더라도 매혹적이었다. 직각이 수천수백 개가 모이고 흩어져서 이루는 공간미와 그 역동성은 잠시 내 숨을 멎게 만들었다. 몇 년 전 봤던 예일대 도서관 이후로 가장 인상적인 도서관이다. 도대체 멕시코인들의 독창적 공간감각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도서관에는 여기저기 굳이 그곳이 정해진 쉼터가 아니더라도 엉덩이를 붙이고 쉬는 사람들이 많았다. 책을 보지 않아도 내가 어떤 책 안에 포개져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의 도서관에서 나도 그들처럼 대리석 바닥 혹은 계단에 철퍼덕 앉은 채로 오고 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구경했다. 이런 도서관을 가지고 있는 이 하찮은 문명인들. 멕시코인들의 밀입국을 막겠다고 콘크리트 장벽을 세우겠다는 무식한 트럼프와 그를 지지한 미국인들이 문득 떠올랐다.
부에나비스타 기차역. 전철과 기차의 환승센터다.
시내버스 정류장. 우리나라에서 BRT이라는 개념으로 도입하고 있는 바로 그 시스템인데, 아마도 세계 최고 수준의 버스 중앙차선 시스템을 갖춘 곳이 멕시코시티가 아닐까 싶다.
짐을 만들 수 없어서 외면했지만 하나쯤 기념으로 사고 싶었다.
도서관을 나와 두 번째 목적지인 멕시코 혁명 기념비를 향해 출발했다. 버스카드를 샀다. 도대체 어떻게 사야 되는 것인지 두리번거리고 있으니까 누군가 와서 도와준다. 카드를 사고 거기에 선불 충전을 해서 버스에 태그를 하면 됐다. 버스요금은 6페소. 우리 돈 3백 원 남짓. 멕시코시티에는 전기로 가는 녹색버스, 2층 버스, 사진에 보이는 빨간색 광역버스 등이 있는데, 가격은 대동소이하다. 인상적인 것은 바로 이 빨간색 버스들이다. 중앙차선을 이용해서 달리는데 승차장이 버스 문 높이에 맞추어져 있다. 굳이 버스 계단을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승하차가 가능하다. 버스 중앙차선이 시티 전역에 촘촘하게 잘 이어져 있고, 막힘이 별로 없어서 꼭 지하철 같은 느낌이 든다. 지하철처럼 버스의 앞좌석이나 굴절버스의 앞칸은 여성전용이다. 드디어 멕시코시티의 주요 대중교통 이용방법을 터득했다. 버스를 타고 멕시코 혁명기념비로 이동했다. 버스가 오는 시간, 승하차장 정보는 구글맵이 기본으로 제공한다.
멕시코 혁명기념비. 위로 올라가면 전망대가 있다. 우리 돈 만원 정도의 입장료가 있다.
혁명기념비 앞 광장
전망대에 있던 커피숍
전망대 북쪽의 스카이라인
멕시코시티의 서쪽하늘. 시티로 랜딩 하는 비행기들이 저쪽으로 크게 원을 그린다.
멕시코시티의 연인들
시티의 동쪽. 소깔로 광장이 있고, 멀찍이 공항이 있다.
멕시코시티의 연인들 2. 어딜 가나 여자한테 안기는(?) 남자들이 많다. 좀 독특했는데 자주 보다 보니 또 익숙해진다.
노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광장 아무 곳이나 엉덩이 깔고 앉아 쉬는 사람들.
멕시코 시티의 연인들 3.
언제가 적어도 한 번쯤 다시 날아가고 싶다. 멕시코시티로.
멕시코시티의 연인들 4.
노을이 집니다.
멕시코 혁명은 1910년부터 20년대에 걸쳐 이루어진 정치혁명이다. 디아즈의 독재와 경제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시민들의 거센 시위가 꽤 오랜 기간 지속되었고 이 과정을 통해 멕시코 국민혁명당이 결성되어 2000년대까지 정권을 잡았다.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유행하던 시기이기도 했고, 멕시코 정치의 본류가 멕시코의 국부 베니토 후아레즈의 사상과 이념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멕시코 혁명은 큰 틀에서 사회주의 혁명이기도 했다. 이런 정치적 흐름과 배경이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은 멕시코가 시민들의 교통과 교육, 문화적 혜택, 여성정책 등을 선진적으로 이끌고 있는 배경일 것이다.
이 기념비는 원래 멕시코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입법 궁전으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독재자 디아즈가 실각하고 혁명이 진행되며 기본 설계가 변경되었고, 건축 목적도 혁명을 기념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건축물은 웅장한 남성미를 뽐내는 디자인이지만 밤이 되면 보라색이 주를 이루는 조명을 받아 우아하고 화려한 자태를 드러낸다. 돔 바로 아래층에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가까이에 높은 빌딩이 없어서 그다지 높지 않은 전망대임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시티 전역이 잘 보인다. 전망대 입장료는 60페소. 가성비 뛰어난 데이트 코스다. 1층에서 백과 소지품을 맡아준다. 숙소 이동 간에 캐리어 맡길 곳이 마땅치 않을 때 이용해 볼만 하다. 이곳도 내가 멕시코시티에서 꽤 좋아했던, 그래서 몇 번을 다시 들렸던 최애 장소다. 사방으로 펼쳐지는 전망도 좋고, 그 아래 카페의 분위기도 좋다. 또 그 아래 광장의 분위기는 그 어느 곳보다 아늑해서 더 좋다.
혁명기념비 아래서 버스킹 하는 록밴드와 댄서
록밴드와 댄서. 며칠 전 봤던 버스킹과 같이 앞에서 격렬한 춤을 추는 댄서가 인상적이다.
하카란다 꽃이 만발한 광장.
유난히 간지 나던 공연 갤러리.
갤러리들
이걸 뭐라 해야 하나... 록이긴 한데 굉장히 토속적이다. 우리나라 창하듯이 뿜어내는 보컬이 강렬하다.
분위기 어쩔.. 어스름 저녁 공기를 빼곡하게 채워주던 퍼포먼스.
이들은 이들만의 무엇이 있다.
기념탑 아래 광장에서는 마침 록밴드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길게 한 음을 강렬하게 토해내는 록밴드의 보컬과 그로테스크하고 장엄한 사운드도 인상적이었지만 그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댄서의 분장과 격렬한 춤사위는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들 세계로 끊임없이 무엇인가 흘러들어 오지만 이들은 그것들을 이들 나름대로 바꿔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듯하다. 내가 여행 내내 그들에게서 읽어낸 것 중 하나가 문화적 자부심이다. 건축물도, 음악도 그리고 회화들도 그들은 굳건한 그들만의 것을 가지고 있었다.
멕시코시티의 연인들 5. 이런 사진은 버드에다 팔아먹어도 되지 않을까.
또다시 보라색.
해가 떨어지고 난 후 남성적인 웅장미를 자랑하던 멕시코 혁명 기념탑은 보라색 조명을 받고 화려하게 탈바꿈했다. 한 두 시간 정도 더 광장의 밤풍경을 즐겼다. 다음날 숙소가 바뀔 예정이었기 때문에 조금 이른 저녁이었지만 숙소로 그만 돌아가기로 했다. 며칠간 이 아파트에 정이 들었다. 내 몸에 딱 맞았던 침대도 좋았고, 여행객에게 딱 적당했던 오래된 서랍장과 더 오래되어 보이던 작은 책상도 좋았다. 건물 벽을 타고 흘러내려와 창으로 스며들어 오는 공기도 좋았다. 밤늦게까지 시끄럽던 그 기타 소리도 그리워질 것이다. 그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우버를 불렀다. 서늘하게 식어버린 밤공기가 차창을 밀고 들어와 뺨을 때렸다. 한편 두렵고 몹시 설레었던 멕시코 여행의 1장 1막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