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를 내려보다
마치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타이베이의 첫 하루를 정신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늦은 오후에 숙소에 들러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숙소 근처 식당에서 가볍게 저녁을 때우고 전철로 상산역까지 이동했다. 대만의 랜드마크 빌딩인 타이베이101과 타이베이의 야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타이베이 시내의 야산이다. 서울의 남산같은 곳이다.
위도가 낮긴해도 겨울은 겨울인지라 초저녁인데도 도시에는 금새 어둠이 깔린다. 가로등은 부단히 작가들의 시선을 잡아끌어 흔한 엽서의 사진이 되고, 노랫가사가 되고, 시가 된다. 오래전 남산에서 아파트 같은 것들이 없던 오래된 동네의 가로등을 바라보면 노란색 가로등은 밤하늘에 점점이 박힌 별들처럼 깜빡였다. 숨죽인 골목, 조용한 거리 끝에 걸린 별들은 바람 한점 없는데도 차가워진 공기 사이를 떠돌다 내 눈동자 끝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그 가로등 불빛 아래서 어느 때인가는 친구와 격정적 토론을 했고, 어느 때인가는 누군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대만 골목의 가로등과 골목의 풍경은 7,80년대의 우리 동네 같은 느낌이다.
앞뒤로 창하나 없이 트여 있는 동네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동네 사람들. 양손으로 식사하는 모습이 색다르다. 자녀들이 다 독립해 나간 집 안주인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삼시세끼를 집에서 해결하는 삼식이 남편이라던가... 적어도 이 나라에서는 그런 삼식이가 보기 드물지 않을까 싶다.
상산은 그리 높지 않은 동네 야산이다. 늘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니 자연스레 오르는 길 주변으로 식당과 카페가 많다. 우리 남산이 그렇듯 이곳도 연인들의 땅이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도시가 화려한 형형색색의 빛으로 화장을 짙게 하고 유혹하는 밤풍경을 바라보는 관객의 설레임과 두근거림은 연인들의 심장박동을 뛰게 할 것이다.
상산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네온사인과 그 옆 작은 카페. 상산은 높이 180미터 정도 되는 낮은 구릉같은 산이고 오르는 길은 1.5키로미터 정도 된다. 가는 길목마다 작은 카페들이 많이 있다. 굳이 들어가 차 한잔 하지 않아도 창밖으로 새어나오는 백열등 불빚과 그 빛이 번져 나오는 골목의 풍경은 산길을 오르느라 땀이 찬 심장을 가라앉혀 준다. 눈으로 차 한잔을 조용히 마시고는 다시 한 걸음 딛는다.
코끼리를 닮은 산, 상산에 오르는 마지막 계단길은 꽤 가파라서 숨이 금새 차올랐다. 아래쪽에서는 눈치챌 수 없었던 인파가 좁은 정상 부근에 가득했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인트를 확보하기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인파로부터 떨어진 풀숲을 억지로 헤치고 들어가니 삼각대를 세울만한 공간을 겨우 찾을 수 있었다.
타이베이101과 그 주변의 빌딩들이 이루는 스카이라인은 조화롭고 아름다웠다. 대단지 아파트들이 만들어 내는 우리 대도시의 스카이라인과는 다른 느낌이다. 그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을 누군가는 특유의 미적 감각으로 찾아내겠지만. 난 그 옛날 서울의 낮고 다양했던 야경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