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가 너무나 성공하는 바람에 '광야'가 뭔지는 몰라도 '광야'라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나도 마찬가지다. '광야'에 대해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이해는 없지만, 이게 아이돌판에서 흔히 말하는 '세계관'이라는 걸 아는 수준이다. 그리고 요즘 엔터 회사에는 세계관 스토리 기획/개발 부서가 있다는 걸 안다. 문제는, 그러니까 그게 존재한다는 걸 알긴 아닌데 내용까지 알고 싶지는 않은 내 성정에 있다. 몰랐고, 지금도 잘은 모르고, 앞으로도 몰랐으면 좋았을 세상인데 애석하게도 작사가 하고 싶은 나는 모르고 살 수가 없다는 비극적인 현실 앞에 서 있다. (아, 작사 의뢰가 들어오는 데모곡의 80% 이상은 케이팝이다. 절절한 발라드나 드라마 OST는 구경하기 어렵다.)
고백하건대, 나에겐 덕엔에이가 없다. 덕질을 할 DNA가 없으면 덕질이 안 된다. 그건 타고나는 성정이라고 생각한다. 통장을 바치고 마음을 바치고 시간을 바치고 속속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게, 남들은 모르는 걸 알아채고 싶어 하는 게 덕질일 텐데 나는 누가 돈을 줘도 못 하는 게 그 덕질이다. 세계관이란, 이 DNA가 없는 사람에게는 너무 먼 별나라 이야기고 공부를 해도 금세 휘발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거 좀 모르면 어때? 기깔나게 쓰면 그만이지"도 별로 먹이지 않는 업계라는 게 나를 슬프게 한다. 요즘 케이팝 아티스트들은 저마다의 세계관을 갖고 있고 (물론 세계관이 없는 그룹도 있다. 사랑한다.) 이건 이들의 정체성이 되며, 앨범의 콘셉트와 트랙 구성 그리고 가사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여러 개의 앨범을 시리즈로 제작하는 장기 플랜을 갖고 있는 그룹도 있고 몇 개의 앨범들이 가진 각각의 키워드가 하나로 합쳐져 비로소 하나의 세계관을 완성, 탄생시키는 경우도 있다. 흔하게는 하나의 세계관 안에서 막 데뷔한 순간부터 점점 성장해 나가는 스토리가 담긴다. 각각의 앨범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아티스트의 세계관 안에서 유기적으로 기능하는 하나의 요소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 요소들은 세계관 안에서 충실하게 기능해야 한다. 나는 이런 사실을 작사를 하며 처음 알았다.
잊지 말아야 할 건, 지금 내가 가사를 쓰고 있는 이 곡이 이들의 세계관 안에서 어느 지점쯤에 존재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여정 안에서 앞서가서도 안 되고, 이미 지난 여정을 반복해서도 안 된다. 다음 스텝에 어디로 나아갈지 엔터사는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지만 만약 내 가사가 그 방향성을 찰떡같이 제시해 주고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아티스트마다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있다. 그리고 앨범이 거듭될수록 이 반복되는 단어의 기능이 묘하게 변화하고 진화하는데 작사가는 그 변화를 캐치하고 있어야 한다. 심지어 자주 사용하는 단어와 충돌하는 다른 표현은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세계관이란 이토록 섬세하고 예민한 거란 말이다. 일반 리스너들은 죽어도 알아챌 리 없지만 팬들이 알고 회사가 알고 아티스트가 안다. 그러니 이걸 이해하고 가사를 쓰는 작가와 그저 곡의 무드에 어울리는 가사를 쓰는 작가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나로서는 억울하다!! 억울해!!!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게 케이팝의 문화고, 이 산업에 몸 담고자 하는 나는 불평을 뒤로하고 공부하는 수밖에는 없다.
그런데 나는 이게 너무 재미가 없다. 흥미롭지가 않다. 덕후들은 이게 재밌을까? 나도 심장을 내줄 것 같은 덕질을 해봤지만 그건 2002년 전국민이 붉은 악마가 됐던 것처럼, 그 시절 교복을 입은 자라면 그땐 응당 그래야 했던 H.O.T. 덕질이었고 20여 년 전,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덕질은 막을 내렸다. 그 이후로는 차세정을, 김종완을, 이소라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20년을 살았고 그들은 내게 이런 세상이 있는 걸 알려주지 않았다. 가뜩이나 MZ들 문화 따라가느라 가랑이 찢어지는 삶을 살고 있는데, 하필이면 또 이런 컬처를 택했나.
돌판의 세계관. 이건 내가 작사를 접하고 난 뒤 가장 나를 괴롭히는 것 중 하나다. 세계관인가 뭔가는 어떤 놈이 만든 거야? 라는 말을 속으로 천 번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불만은 불만일 뿐 뭐 어쩌겠나. 그래서 꼭 누군가에겐 넋두리를 하고 싶었다. 또 하나 고백하자면 나는 불평할 만큼 공부를 하고 있지도 않다. 얼렁뚱땅 그까이꺼 대충 모른 척하며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데, 내가 이 일을 계속할 거라면 언제까지나 모른 척할 수 없고, 정보와 지식이라는 건 계속 누적되는 건데 데이터가 없는 사람은 데이터가 쌓인 사람을 이기기 어렵다는 것 역시 모르지 않으니 불평한 만큼 공부도 좀 해보기로 마음을 먹어본다. 그래도 한 번만 더 불평하면 안 될까? 아, 정말 모르고 싶다. 조만간 세계관이 다시 몽땅 사라지는 트렌드가 오길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