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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선 Jan 07. 2018

소속되지 않을 자유

프란츠 카프카, 『성』


 제가 쓴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 (사우, 2017)의 내용을 브런치에 맞게 요약하여 연재합니다. 전체 글은 책을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자세한 책 소개를 둘러보세요.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91187332145


당신은 세상에서 함께 무리지어 살아가고 싶은가, 아니면 낯설고 외로운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의 삶을 원할 것이다. 인간이란 함께 살아가도록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삶이 자기 자신에 대한 포기를 요구한다면 얘기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나와 세계가 대립하고 불화를 겪는다면, 그때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내가 세계에 맞추어야 하는가, 아니면 세계를 나에 맞도록 바꾸어야 하는가. 세계를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세계에 소속되지 않고 사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1921년에 집필된 카프카의 미완성작 『성(城)』을 읽으면서 평소 가졌던 그런 질문들이 다시 떠올랐다. 이 소설은 성으로 가려고 마을에 온 토지 측량기사 K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성 사이의 대립을 그리고 있다. K는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투쟁을 벌이지만, 성은 끝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기다리다 지친 K는 결국 패배하고 만다. 



어둠과 안개에 가려진 성()


K는 카프카 자신이기도 하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도 없고, 이름도 없으며, 성 아래 마을 사람들로부터 불편한 시선을 받는 K는 낯선 이방인이다. 그는 성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마을을 떠나지도 않으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기다림의 시간을 보낸다.


카프카 자신이 어느 세계에도 속할 수 없는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살았기에, 그의 작품에는 그런 이방인들이 자주 등장한다. 『성』의 주인공인 토지측량사 K도 그러하다.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그가 어느 날 낯선 마을에 도착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마을 사람들은 철저하게 성의 지배와 통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K는 자신이 성의 백작이 불러서 온 토지 측량기사라고 설명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성에 전화를 걸어서 확인하려 한다. 전화를 받은 성에서는 오락가락하다가 결국 성에서 K를 측량사로 명했음을 확인해준다. 그렇다고 K가 성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성은 끝까지 K의 입장을 거절하며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성은 K가 가까이 가려고 거듭 시도하지만 끝내 다가갈 수 없는 곳이다.


성의 관리들은 K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며 계속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 또한 K가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K는 초청받은 사실을 가까스로 확인받지만, 그것은 행정 착오일 뿐이며 측량은 필요하지 않다는 설명을 듣게 된다. 면장은 K에게 자신들은 측량사가 필요 없다고 말한다.


면장은 토지의 소유 변동은 거의 없다고 했다. 그런데 토지 측량을 한다는 것은 기존의 토지 소유를 재검토하겠다는 것으로, 혁명적인 반란 행위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성은 K에게 토지 측량을 맡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곳에서 K가 할 일은 없어지는 셈이다. 토지 측량을 하겠다는, 그리고 굳이 성으로 들어가겠다는 K는 성의 입장에서는 통제해야 할 저항자다.


면장의 말을 들은 K는 자신을 초대한 일에 대해 따져 묻는다. 감독관청의 기능이 속이 메스꺼울 정도로 엉망이 아니냐고 K는 항의한다. 하지만 면장은 관청의 행정적 착오를 설명하면서 “그건 가장 소소한 일 중 하나”라며 K가 푸념할 일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K의 경우는 극히 하찮은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면장은 오히려 K에게 경고한다. 갑자기 당신이 나타나 마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절대로 용인하지 않겠다고. 



예속되지 않으려는 자의 싸움


두 사람의 대화는 논쟁으로 치닫는다. K는 법이 악용되고 있으며 자기 자신을 위해 그에 대항할 수 있다고 면장에게 말한다. K는 자신은 이미 측량사로 채용되었다며 자신이 성의 권력자 클람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꺼내 보여준다. 하지만 면장은 그 편지는 공문서가 아닌 개인 편지이며, K가 측량사로 채용되었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으므로, 채용에 대한 입증 책임은 K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K의 처지는 애매해졌다. “당신을 여기에 붙들어두는 사람은 없지만 그게 내쫓겠다는 뜻은 아닙니다”라는 면장의 말을 듣고는 마을에 머무르며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에 나서기로 한다. K는 면장에게 말한다. “난 내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지 성에서 베푸는 선심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K는 어떻게든 성에 들어가려 한다. 이제 K에게 그것은 성을 상대로 하여 자아를 찾으려는 투쟁이다. 하지만 성은 분명 마을 위에 있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다. 


여관 여주인은 K에게 클람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클람 씨가 성에서 나온 분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지체가 매우 높다는 뜻”이라며 “당신은 절대 클람을, 정말로 만날 순 없어요”라고. 소설에서 클람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스러운 존재다. 카프카는 이 상황에서 K가 동시에 겪는 자유와 절망이라는 상반된 현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K에겐 마치 이제 모든 관계가 끊어지고 어느 때보다 더 자유롭고, 다른 때라면 그에게 허용되지 않는 이곳에서 내내 마음대로 기다려도 되며 이렇게 다른 사람이 얻기 어려운 자유를 획득한 것 같고, 그러니 아무도 그를 건드리거나 쫓아내선 안 되고 아마 말을 거는 것도 안 되는 것 같았지만, 아울러 이 자유, 이 기다림, 이 불가침성보다 무의미하고 절망적인 것은 없다는 듯이 느껴졌다.


모든 것이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미궁이다. 이름도 모르는 K는 어디서 온 누구인지, 성에서는 누가 왜 K를 초청했는지, K는 왜 굳이 성으로 들어가려 하는지, 모든 것이 마치 꿈속에서 벌어지는 일인 양 서술된다. 



이방인의 기다림과 절망

 

마침내 성의 권력자 클람의 수석 비서인 에어랑어가 자신을 찾는다는 얘기를 K는 듣는다. 그래서 K는 새벽 시간 여관에서 에어랑어의 방을 찾다가 그의 비서인 뷔르겔의 방에 우연히 들어가게 된다. 뷔르겔은 자신을 만난 것을 기회로 생각하고 자신과 대화를 나눌 것을 K에게 권유한다. 그런데 뷔르겔의 얘기를 듣던 K는 피곤을 견디지 못하고 졸고 있다. K에게 뷔르겔은 “어려운 문제를 놓고 상의하는 관리가 아니라 그의 잠을 방해하는” 아무 의미 없는 존재일 뿐이다. 그 중요한 순간에 K는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졸고 마는 것이다. 뷔르겔은 민원인을 상대하는 업무가 피곤하다는 점, 특히 밤에 심문을 하면 사적 감정이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장황하게 말하지만, K는 더 이상 듣지 않고 잠을 잔다.


K가 잠든 것은 그의 패배를 의미한다.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성을 상대로 한 투쟁에 나섰다면 관리와 대화하는 기회를 살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다만 꿈속에서 발가벗은 뷔르겔을 향해 돌진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지만, 마침내 모두 사라지고 큰 방에는 K 혼자뿐이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K는 적을 상대로 돌진하여 이기는 것 같았지만 주위에 아무도 없는 공허함만이 남았다. 뷔르겔의 장황한 설명을 견디지 못한 K가 지쳐서 잠들고 만 것은, 성을 상대로 한 공허하고 지루한 싸움에 지쳐버린 K의 모습을 보여준다. 


애당초 K가 마을에 온 것은 토지 측량이라는 목적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필요성이 성에 의해 부정된 상황에서 K는 성으로 들어가기 위한 투쟁을 벌인다. 목적은 뒤바뀌어버렸다. K가 왜 그렇게까지 성으로 들어가려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성으로부터 초청받은 자신의 권리를 찾고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성으로 들어가는 데 매달림으로써 그는 오히려 자유를 잃게 된다. 그리고 성으로 들어가려던 시도는 실패한다. 그는 지쳐버렸다. 성과의 투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K라는 개인은 성이라는 거대한 힘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물론 성은 개인의 권리나 자아, 그것을 위한 저항을 허용하지 않는다. 거대한 성을 상대로 한 개인의 시도들은 무력할 뿐이다. 그런데 K의 실패가 더욱 비참한 것은 그 자신의 왜곡된 선택 때문이다. K는 성과의 투쟁에 나서지만 막상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성의 속성을 알지 못했고 성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그래서 K는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할 뿐이다. 그것은 성이라는 거대한 조직의 힘 이전에, K라는 개인이 갖는 실존적인 한계였던 셈이다. 그래서 K는 좌절한 인간이다. 카프카는 이방인 K의 기다림과 지침,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을 말하고 있다.



성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말 것인가

 

카프카에게 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다. 성은 어둠과 안개에 휩싸여 있는 알 수 없는 존재다. 카프카는 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한마디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 성 안에 무엇이 있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끝내 알 수가 없다. 성은 권력일 수도 있고 관료주의일 수도 있고 전체주의일 수도 있으며, 혹은 종교일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거대한 세계일 수도 있다. 성의 의미는 소설을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와닿는다.


다만 성은 마을 사람들을 통제하는 힘의 상징이다. 성이 어떤 물리적 위협을 가하는 것이 아님에도 마을 사람들은 맹목적인 복종을 하고 있다. 성 아래에는 클람과 그의 관리들을 무기력하게 추종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성의 힘은 막강하고 그 권위를 믿는 사람들 누구도 성을 거역하지 않는다.


나에게도 성이 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성은 세상이다. 성 안에는 가까운 사람들끼리 무리지어 모여 있다. 그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땅이야말로 최고선이라고 굳게 믿는다. 성의 문지기들은 성을 지배하는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에게만 문을 열어준다. 그래서 문 앞에서 양자택일을 요구한다. 성에 들어와 그곳에 소속되어 하나가 될 것인지, 아니면 성에 들어올 것을 포기하든지. 그 사이에서 다른 선택은 불가능하다. 


나는 성문 앞에서 갈등하게 된다. 어떤 성도 선(善)으로만 채워져 있지 않다. 세상의 모든 곳에서 선과 악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그렇지 못할진대, 그래서 인간이 살아온 것이 그렇지 못한데, 어떻게 그 성만 지고지선의 땅이 될 수 있겠는가. 어느 성에도 저마다의 불편한 진실들이 존재한다. 선한 이름 뒤에 숨어 있는 위선과 이기적 욕망,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는 질투와 명예욕, 정의를 독점하려는 배타성,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쟁투, 거칠고 무례한 정치, 무리지어 뒤쫓아가는 대중들. 그런 것들에 눈감고 성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은 K의 맹목적인 행동과 다를 바 없다. 문지기가 나더러 자아를 포기할 것을 조건으로 제시한다면 나는 성으로의 입장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으로 들어갈 것을 포기하고 돌아서는 것은 고독한 길이다. 성과 타협하여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내 옆에 누가 남아 있을지조차 알 수 없다.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않은 삶의 외로움, 하지만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않은 삶의 당당한 자유, 그 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번민한다. 


두 길 사이에서 갈등은 계속된다. 자아를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를 드러내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성을 기웃거린다. 내가 설혹 성 안으로 들어간들 부조리한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기를 진즉에 단념하고 성을 등지고 반대의 길로 떠났어야 했다. 세상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끊고, “세상이란 원래 그런거야” 하며 나의 삶을 사는 것이 갈 길이었다. 그런데도 성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꾸만 바라보는 것은 미련이다.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외로움에 대한 불안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지 모른다. 들어가고 싶지도 않지만 아주 떠나지도 못하는. 


 카프카는 K에게 절망했다. 내가 세상의 성을 상대로 대결한다면 역시 승산은 절망적이다. K가 그랬듯이 패하고 말 것이다. 나는 거대한 성과의 싸움에서 이길 도리가 없음을 알 안다.대신 내가 이길 수 있는 것은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다. 그러니 성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K처럼 무작정 기다릴 것이 아니라 차라리 다른 길로 가는 것이 낫다. 자기만의 진실을 지키는, 조금은 외로운 길로.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 (사우, 2017)


"당신의 영혼을 흔들고 찌를 12권의 책

읽고 사유하는 사람만이 싸우고 사랑할 수 있다"


저자 유창선은 내면의 힘을 키워준 책 12권을 소개한다. 단순히 인문학 고전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자신의 내면 풍경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오늘 이곳에서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밀도 있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자신의 진실을 지키고 존엄을 잃지 않으려고 분투하는 한 지식인의 자기 탐구 기록이기도 하다. 책 읽는 사람이 시공간을 초월해 위대한 사상가와 온몸으로 만날 때 그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제가 쓴『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자세한 책 소개를 둘러보세요.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9118733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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