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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선 Jan 14. 2018

애도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나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제가 쓴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 (사우, 2017)의 내용을 브런치에 맞게 요약하여 연재합니다. 전체 글은 책을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만이 알고 있는 아픔의 리듬이 있다."


이별 중에서도 가장 아픈 이별은 가족 간의 사별(死別)일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혹은 형제간의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별 앞에서 우리는 슬퍼한다. 그 슬픔의 깊이에는 살아온 흔적들이 담겨 있다. 그래서 가족을 떠나보내는 슬픔에는 가족의 역사만큼의 깊이가 자리하고 있다.


 『애도일기』는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 앙리에트 벵제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일기를 모은 책이다. 바르트는 1977년 10월 25일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날부터 거의 2년 동안 이 일기를 썼다. 



끝없이 빠져드는 상실의 슬픔


이 책에는 자신을 지극히 사랑했던 어머니와의 이별 이후 바르트가 겪은 끝없이 깊은 슬픔과 괴로움, 그리고 그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삶의 주체로 다시 탄생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상실의 슬픔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파헤치는 그의 일기들은 아프면서 아름답다. 작가의 내면적 자아는 사랑의 상실로 무너져버리는 과정을 겪는다. 하지만 바르트는 그 혹독한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게 된다. 


어머니는 언제나 바르트를 지켜주던 선한 존재였다. 그랬던 어머니를 잃었을 때 그의 슬픔은 주체할 수 없이 컸다. 그 슬픔과 애도는 시한부가 아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슬픔’, ‘특발적(特發的)인 슬픔’이었다. 그렇게 특별하게 생겨난 것이기에 바르트는 “이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단언한다. 바르트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슬픔을 가늠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르트는 이미 자신이 느끼는 슬픔의 깊이가 타인과 다를 것임을 짐작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바르트도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는 이야기를 하고 농담도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격렬한 감정 상태에 빠진다. 무너지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다가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멀쩡하게 얘기하고 농담도 하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어머니무엇도 대체할 수 없는 사랑


이렇게 바르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허물어짐을 고백한다. 그만큼 주체하기 어려운 깊은 슬픔이라는 얘기다. 그것은 어떤 슬픔이기에 그리 깊고 아픈 것일까. 바르트에게 어머니의 상실은 사랑의 관계가 끊어진 데 따른 슬픔이다.


"내 슬픔은 삶을 새로 꾸미지 못해 생기는 게 아니다. 내 슬픔은 사랑의 끈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1977년 11월 6일)


프로이트의 경우 애도는 결국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사랑의 대상을 찾아간다. 그에게 사랑은 ‘대체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바르트에게 어머니의 상실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파인 고랑’이다. 


대체할 수 없는 사랑을 상실하고 고랑이 패었지만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빈 공간은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다. 바르트에게 사랑의 대상은 ‘대체할 수 없는 존재’다. 바르트에게 어머니는 그런 존재였다.


바르트는 슬픔을 정리하려 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melancholy)을 대비시킨다. 애도는 주체가 상처를 껴안고 자기애를 되찾아 또 다른 사랑의 대상으로 이동하는 치유의 과정이다. 반면에 상실의 상처를 떠나지 못한 채 자기애의 추락을 가져오는 우울증은 병리적이며 다른 사랑으로 이동하지 못한다.


 바르트의 슬픔은 프로이트가 말한 애도와 우울증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바르트에게 어머니라는 사랑의 대상을 다른 사랑으로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실이 남긴 부재의 공간’은 그냥 ‘파인 고랑’으로 남는다. 어머니가 아니면 그 공간은 다른 누구로도 채워질 수 없다. 그래서 슬픔에는 끝이 없다.


따라서 바르트의 슬픔은 애도를 거쳐서 곧 일상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예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어머니의 부재(不在)로 인한 ‘해결할 수 없는 슬픔’이다. 



슬퍼할 권리를 빼앗는 사회


하지만 사회는 마냥 슬퍼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그만큼 슬퍼했으면 되었다며 이제 슬픔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오라고 재촉한다. 더 이상 슬퍼할 시간을 주지 않고 이런저런 주문을 하기 시작한다. 바르트는 그런 세상에 항변한다.


"모든 일들은 아주 빨리 다시 시작되었다: 원고들, 이런저런 문의들, 또 이런저런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들,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사랑을 또 인정받기를) 가차 없이 얻어내려고 한다: 그녀가 죽자마자 세상은 나를 마비시킨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거야, 라는 말로." (1978년 6월 15일)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거야”라는 이 말. 우리가 흔히 듣기도 하고 건네기도 하는 말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이 주문을 자신을 마비시키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요구한다. 애도의 슬픔을 결코 억누르려 하지 말라고.


바르트에게 슬픔을 억압하는 사회는 슬퍼할 권리를 빼앗는 나쁜 사회다. 나는 슬픈데 사회는 즐거워하라고 강요한다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이 사회에는 이미 슬픔에 대한 코드가 있다. 슬픔은 규격화되고 그것을 적절한 수준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정해진다. 나만의 고유한 슬픔은 존재할 수 없게 되니, 나는 슬퍼하는 것을 적당히 멈춰야 한다.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78년 6월 24일)


바르트의 슬픔은 남들과 같지 않고 고유하다. 그래서 사회가 코드화한 방식이 아닌 자신의 방식으로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누구나 자기만이 알고 있는 아픔의 리듬이 있다."(1978년 7월 18일)

 


비타 노바애도를 통해 새로 태어나다


끝없는 슬픔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던 바르트였지만,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지금 내게 달라질 게 뭐가 있을까? 분명한 건, 이제 나는 혼자서 세상을 배워가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힘들 통과제의. 자궁 밖으로 나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고난들." (1978년 12월 23일)


이제는 어머니 없이 혼자서 세상을 배우고 어머니의 자궁 밖에 있는 세상으로 나갈 생각을 한다. 그래서 바르트의 깊고 깊은 슬픔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슬픔 속에서 새로운 주체로 태어난다. 그것이 ‘비타 노바(Vita nova)’다. 비타 노바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도가 불러일으키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가리킨다. 


"비타 노바(Vita nova)는 래디컬한 몸짓이다(어떤 단절을 수행하기- 지금까지 살아왔던 길을 끝내기, 그 필연성). " (1977년 11월 30일)


바르트는 비타 노바를 통해 새로운 주체로 태어나는 길을 택했다. 과거의 자신을 뒤집고 자유로워지고, 단단해지고, 진실을 따라 사는 새로운 삶으로. 『애도일기』를 쓰던 첫날밤에 바르트는 이미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타 노바를 통해 바르트가 얻은 새로운 삶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저작 활동에 대한 몰입일 수도 있고, 삶에 대한 새로운 각성일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이 새롭게 탄생했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를 늘어놓지는 않는다. 다만 자신을 다시 찾았다는 말속에서, 상실의 슬픔을 거쳐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다시 부활시키는 위치로 돌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르트의 애도는 가족에 대한 순결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바르트의 나이가 63세.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어쩔 줄 몰라하며 무너지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늙은 아이’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어머니와 살면서 사랑의 주체가 되었고, 다시 애도의 주체가 되었다. 그리고 깊은 슬픔 속에서 마침내 새로운 주체로 탄생했다.


어머니가 떠났을 때 바르트는 생의 마감인가 아니면 새로운 생의 시작인가의 기로에 서 있었다. 생이 끝난 것처럼 무너지던 바르트는 애도의 글쓰기를 거치면서 새로운 생을 시작한다.



애도받지 못한 죽음세월호


우리는 『애도일기』를 통해 깊고 슬펐던 애도의 기록을 접할 수 있다. 애도의 과정은 사실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을 위한 것이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없기에, 산 자들의 애도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충분히 애도함으로써 슬픔을 치유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치유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된다. 계속 죽음에 갇혀 있게 된다. 그래서 산 자가 애도하지 못하고, 죽은 자가 애도받지 못한 죽음은 비극적이다.


세월호의 죽음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는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의 죽음에도 정상적인 애도의 부재로 많은 유가족과 국민에게 크나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2014년 4월 16일에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참사가 벌어지는 순간에 국가는 작동하지 않았고, 온 국민이 TV로 지켜보는 가운데 세월호는 그대로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가족뿐 아니라 국민도 죄를 지은 것 같은 집단 트라우마에 갇혀야 했다.

무엇보다 절망스러웠던 것은, 그 어린 생명들을 죽게 방치하고도 국가의 애도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세월호 참사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이렇게 호소했다.


"1인 시위를 한다고 청와대에 갔는데 눈물밖에 안 나요. ‘대통령은 안에서 뭘 하고 있을까. 자식 잃은 부모가 이렇게 밖에서 하염없이 울고 서 있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담벼락이 너무 높아서 모를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 하면서.” (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금요일엔 돌아오렴』)


국가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이 무릎이라도 꿇고 사죄하고 진상규명을 약속하며 희생자 수습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지만, 국가는 이를 철저히 외면했다. 대통령은 더 이상 가족들을 만나주지 않았고, 진상규명 노력은 온갖 정치적 방해에 직면했다. 가족들을 향해 “이제 그만하라”는 목소리가 등장하며 압박했다. 대신 돈을 주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그 어머니는 이렇게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날, 4월 16일 그날, 진짜 최소한의 노력만 보여줬어도 우리가 이렇게까지 안 해요. 그런데 한 명도 안 구했잖아요. 그때 그 사람들 행동은 급한 게 하나도 없었어요. 의문투성이예요. 이제는 인양도 제대로 안 해줄 것 같아요. 그럼 다 우리 몫이에요. 인양해달라고 하면 통째로는 힘드니 반으로 쪼개서 인양하든가 바다 밑에 묻겠다고 하겠죠. 그럼 애들도 못 건지고 증거도 다 사라지고 돈만 없애는 거예요. 그럼 국민들이 또 뭐라고 하겠어요. ‘그만큼 건져줬음 됐지, 또 돈 들이게 하네’, 그런 식으로 우리만 자꾸 몰아가요. 부모들이 어느 정도 마무리를 짓고 사회활동을 하게 해줘야 하는데, 이 정부는 부모들까지 몰아붙여서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어요. 그래 놓고 ‘유족들이 보상금을 몇 억을 받았다더라’ 그런 식으로 말해요. 부모들을 너무 바보 취급해요. 너무 억울하고 답답해요."


‘애도의 정치’를 통한 사회적 치유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서 국가의 외면과 은폐로 희생자 가족들의 고통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진실이 규명됨으로써 책임이 가려지고 다시는 그 같은 참사가 없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겨날 때, 가족들은 비로소 치유받고 삶의 의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나마 희생자 가족들이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데는 오랜 기간 동안 세월호 광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연대가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오랜 기간  겪어야 했던 엄청난 고통은 국가의 애도가 부재한 결과였다.



충분히 슬퍼해야 자유로워지건만


애도의 부재는 세월호 같은 사회적 사건 말고도 우리들의 일상에서 종종 겪기도 하는 일이다. 애증의 가족사 속에서 핏줄의 죽음조차 슬프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 가족을 보내면서도 슬퍼하지 않는 정서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슬픔이 된다. 


바르트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끝없는 슬픔을 거쳐 새로운 주체로 재탄생한다. 그의 글쓰기는 그런 재탄생의 의미를 갖는 행위였다. 박완서가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참척의 일기 『한 말씀만 하소서』를 썼던 것도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박완서는 『부처님 근처』에서 남편과 아들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작품을 통해 털어놓았던 고통의 이야기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삼킨 죽음을 토해내고 싶었다. 그 무렵 나는 낯선 길모퉁이 초상집에서 들리는 곡성에도 황홀해져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오래 서성대기가 일쑤였다. 저들은 목이 쉬도록 곡을 함으로써, 엄살을 떪으로써 그들이 겪은 죽음으로부터 놓여나리라. 나에겐 곡성이 마치 자유의 노래였다."


그렇게 곡을 해야 자유를 찾는 법. 곡을 하지 않고 슬퍼하지도 않고 보낸 죽음은 자유를 주지 않고 우리를 가두어버린다.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 (사우, 2017)


"당신의 영혼을 흔들고 찌를 12권의 책

읽고 사유하는 사람만이 싸우고 사랑할 수 있다"


저자 유창선은 내면의 힘을 키워준 책 12권을 소개한다. 단순히 인문학 고전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자신의 내면 풍경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오늘 이곳에서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밀도 있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자신의 진실을 지키고 존엄을 잃지 않으려고 분투하는 한 지식인의 자기 탐구 기록이기도 하다. 책 읽는 사람이 시공간을 초월해 위대한 사상가와 온몸으로 만날 때 그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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