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창선 Jan 21. 2018

인간은 왜 영웅과 강자를 원하는가

루쉰, 「고사리를 캔 이야기」

 제가 쓴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 (사우, 2017)의 내용을 브런치에 맞게 요약하여 연재합니다. 전체 글은 책을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살아간다는 말이 단지 경제적인 자립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에 앞서는 것이 정신적인 자립이다.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 진정한 자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렵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약해지면 기댈 곳을 찾게 된다. 가족, 친구, 어른,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받고 도움도 얻고 싶어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혼자 살아가는 것이 미덕이 아닌 이상, 그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이 의존할 항상적인 버팀목을 만들어내려 한다. 그래서 영웅이 만들어진다. 



백이와 숙제지조의 아이콘이 아닌 무기력한 노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천도(天道)를 거스른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며 서우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먹고 살다 굶어 죽었다는 전설적인 현인들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 「백이열전(伯夷列傳)」에 나온다. 백이와 숙제는 부끄럽게 사느니 굶어 죽기를 택한 지조와 절개의 인물로 수천 년 역사에 전해져 내려왔다.


그런데 루쉰의 『고사신편(故事新編)』에 실린 「고사리를 캔 이야기」에서는 두 사람이 대단히 우스꽝스럽게 그려져 있다. 백이와 숙제는 양로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둘은 시국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는 얘기를 나누다가 양로원에서 나오는 구운 전병이 매일매일 작아지는 것을 걱정한다. 형 백이는 동생 숙제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우리는 식객의 몸이다. 서백(西伯)이 늙은이를 봉양하라 했기에 우리가 여기 할 일 없이도 있을 수 있는 거지. 그러니 전병이 작아진다고 해서 불평해서는 안 될뿐더러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아무 말 해서는 안 된다.”

양로원에서 밥을 얻어먹는 신세이니 주는 대로 먹고 아무 불평 없이 지내자는 자조 섞인 얘기로 들린다. 이에 숙제가 “그럼 이제 우리는 여생이나 신경 쓰는 늙은이가 되어버린 거군요”라고 하자, 백이는 “가장 좋은 건 말을 안 하는 거야. 난 이제 그런 얘기 들을 힘도 없어”라고 대답한다. 지조의 상징이었던 두 사람이 양로원에서 전병을 받아먹으며 여생이나 신경 쓰는 힘없는 노인들로 등장하는 것이다. 루쉰은 백이와 숙제의 영웅적인 전설을 그렇게 해체하기 시작한다.



굶지 않으려고 고사리를 애타게 찾다


두 사람은 무왕이 싸워서 이겼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둘은 이제 더 이상 양로원의 밥을 먹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더는 주나라의 전병을 먹지도 말고 주나라의 물건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기로 했다. 두 형제는 화산(華山)으로 가서 야생 열매와 나뭇잎을 먹으며 남은 생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화산으로 가던 중 더는 군사를 일으킬 필요가 없어 왕이 말들을 화산 기슭에 풀어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방향을 돌려 서우양산으로 가게 된다. 말들이 돌아다니는 화산에 가봐야 자신들이 먹을 건 남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고사리가 많이 나는 곳을 악착같이 찾아간 것이다. 그들에겐 애당초 굶어 죽을 생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일찍이 ‘주나라의 곡식은 먹지 않으리라’ 마음먹었기 때문에 서우양산으로 들어온 후에는 그것을 실행에 옮겨야 했다. 그래서 그날 밤 남은 것을 다 먹어버리고 이튿날부터는 뜻을 굳게 고수하여 절대로 융통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마치 내일부터 단식농성 들어가겠다는 사람이 오늘 마지막으로 실컷 먹어대는 모습이다. 말들을 풀어놓은 화산으로 가면 먹을 게 없을 것 같아 급히 서우양산으로 방향을 바꾸고, 내일부터 곡식을 먹지 않으려고 오늘 밤 커다란 주먹밥을 다 먹어치우는 백이·숙제의 모습에서 지조와 절개의 엄숙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두 사람은 먹을 만한 것을 캐러 산을 돌아다녔지만 야생 열매 한 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산 아래 사는 촌부, 아낙네, 아이들이 벌써 다 따갔기 때문이다. 배가 고파진 형제는 넓적한 돌 위에 솔잎 반죽을 얹고 불을 붙여 솔잎떡을 만들어 입에 넣었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때 풀이 꺾인 숙제가 떠올린 것은, 시골 사람들은 흉년이 들면 고사리를 먹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숙제는 정신없이 고사리를 찾아 나섰고 고사리를 뜯어와 백이와 함께 삶아 먹었다. 


그날부터 그들은 날마다 고사리를 뜯었다. 처음에는 숙제가 뜯어오면 백이가 삶는 식이었다. 나중에는 함께 뜯으러 나섰다. 조리법도 다양해졌다. 고사리탕, 고사리죽, 고사리장, 맑게 삶은 고사리, 고사리 싹탕, 풋고사리 말림 등등. 얼마 후 고사리는 바닥이 나버렸다. 둘은 고사리를 찾아 날마다 멀리 나가야 했고, 몇 번 거처를 옮기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면 결국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거처도 점차 구하기 어려워졌다. 굶주리지 않으려고 고사리를 찾아 거처까지 옮겨 다니는 백이와 숙제의 모습은 의롭게 굶어 죽었다는 전설과는 거리가 멀다. 루쉰은 배고픈 형제의 모습을 그렇게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어떠한 숭배도 마다하고 전설의 이면을 파헤치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우양산에서 제일 높은 사람인 소병군(小丙君)이 찾아와 백이·숙제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무릇 하늘 아래에 임금의 땅 아닌 곳이 없다’ 했으니, 도대체 당신들이 먹고 있는 고사리는 우리 성상폐하의 것이 아니란 말인가?”


형제는 할 말이 없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고사리를 먹고 있는데, 스무 살가량의 여자가 보고 물었다. “왜 이렇게 변변찮은 것을 드세요?” 백이가 “우리는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기 때문에……”라고 말을 꺼내자 그녀는 잠시 냉소를 짓더니 소병군과 똑같은 말을 했다. 


“‘무릇 하늘 아래에 임금의 땅 아닌 곳이 없다’ 했으니, 당신들이 먹고 있는 고사리는 우리 성상폐하의 것이 아니란 말인가요?”


백이와 숙제는 날벼락을 맞은 듯 놀라 정신이 아득해졌다. 먹다 남은 고사리, 물론 먹지 않았다. 아니 먹을 수가 없었다. 주나라 곡식은 먹지 않겠다면서 주나라의 고사리는 열심히 캐먹고 있는 형제를 루쉰은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그로부터 20일 뒤 백이와 숙제가 한 덩어리로 웅크린 채 바위 동굴 속에 죽어 있는 것을 나무꾼이 우연히 발견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백이와 숙제가 죽은 이유에 대해 제각각 의견을 말했다. 이에 소병군의 집 하녀 아금이 자초지종을 말한다. 하느님이 두 사람이 금방 굶어 죽게 생긴 것을 보시고는, 암사슴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젖을 먹이도록 했다. 하지만 그들은 사슴의 젖을 먹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사슴 젖을 먹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 사슴이 이렇게 포동포동하니 잡아먹으면 그만일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슬그머니 팔을 뻗쳐 돌을 움켜쥐려 했다. 그들은 사슴이 신통력 있는 동물임을 몰랐던 것이다. 사슴은 그들의 속마음을 꿰뚫고서는 곧바로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하느님도 그들의 탐욕이 밉살스러워서, 이제부터는 갈 필요가 없다고 암사슴에게 말했다. 결국 두 사람은 고사리도 먹지 못하고 사슴 젖도 먹을 수 없게 되어 죽고 만 것이다.


“모든 게 다 그놈들의 탐욕스러운 마음과 탐욕스러운 주둥이 때문”이라고 아금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왠지 마음이 가벼워졌던 것이다. 백이와 숙제의 죽음에 그들은 아무 책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굶어 죽은 절개의 인물 백이와 숙제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당혹스러운 내용이다. 우리의 기대와 정반대로 백이와 숙제는 사슴의 젖도 모자라 아예 잡아먹으려는 탐욕을 부리다가 결국 굶어 죽은 인물들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루쉰의 작품들은 권위에 대한 어떠한 숭배도 인정하지 않고 전설의 이면까지도 파헤친다. 그래서 신화적 영웅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언제나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루쉰은 그것을 감내하면서 역사에서 진정으로 올바른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을 통해 그 답을 구하려 했다.



영웅은 없다다만 만들어질 뿐

 

사마천의 백이·숙제와 루쉰의 백이·숙제 가운데 어느 것이 진실이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모든 시대에는 여러 개의 진실이 주장되기에 복수의 진실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영웅에 관한 얘기도 그러하다. 영웅에 관한 진실은 상상력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그 영웅을 중심으로 미화된 진실 세계를 구축한다. 하지만 영웅을 중심으로 한 서사는 이성과의 충돌을 흔하게 동반한다. 그것은 사실을 건너뛴 상상력에서 나온 믿음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인문학 작가가 되기 이전에 오랫동안 정치평론을 해왔다. 그런데 정치의 세계에는 저마다의 영웅들이 존재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영웅을 중심으로 정치의 서사를 쓴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정치적 영웅을 인정하기를 거부해왔다. 다른 사람들이 영웅이라 칭송하는 인물들이 훌륭한 줄 몰라서가 아니었다. 정치라는 것 자체가 욕망의 덩어리일진데, 그곳에 지고지선의 얼굴만 가진 우리들의 영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받는 영웅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행위는 무척 힘겨운 과정을 감수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영웅이 모두의 영웅이 되기를 바라며, 영웅에 대한 합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웅적인 신화의 이면에는 현실의 그늘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 빛과 그늘에 대한 냉정하고도 균형 잡힌 시선을 가질 때 우리의 이성은 비로소 세상 속에서 작동할 수 있다. 거짓된 영웅 만들기가 이성의 작동을 막아버린 최악의 사태가 박근혜 정부의 탄생과 몰락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저마다 자신의 영웅을 만들어놓고 그 울타리에 갇혀버리는 경우를 흔하게 본다. 자신의 영웅을 무오류의 신화로 포장하고 그의 잘못까지도 뒤따르기에 급급하다. 거기서 본래 가졌던 나의 생각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내가 아니라, 그 영웅이 내 생각의 중심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의 이성은 작동을 멈추게 된다. 하지만 그래도 될 영웅은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웅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질 뿐이다.


나의 영웅은 누구인가. 나에게는 내가 영웅이다. 당신에게는 당신이 영웅이다. 구태여 멀리 있는 백이와 숙제를 영웅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지상의 세계에 메시아는 없더라. 나는 그래서 백이와 숙제마저도 조롱한 루쉰이 좋다.

 

<참고문헌> 루쉰, 루쉰전집번역위원회 옮김, 『루쉰전집 3: 들풀』, 그린비, 2015.


당신의 영혼을 흔들고 찌를 12권의 책

읽고 사유하는 사람만이 싸우고 사랑할 수 있다


저자 유창선은 내면의 힘을 키워준 책 12권을 소개한다. 단순히 인문학 고전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자신의 내면 풍경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오늘 이곳에서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밀도 있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자신의 진실을 지키고 존엄을 잃지 않으려고 분투하는 한 지식인의 자기 탐구 기록이기도 하다. 책 읽는 사람이 시공간을 초월해 위대한 사상가와 온몸으로 만날 때 그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이전 04화 애도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