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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호 Oct 02. 2024

밤길에서 만난 것들

느지감치 그림일기 12

 우리 동네 기차역은 걸어서 40분 거리에 있다. 평균 10분을 기다린 끝에 오는 역으로 가는 버스는, 동네 구석구석을 굽이쳐 흐르다가 역 앞에 설 때까지 30분 가까운 시간이 필요하다. 한겨울이 아니라면 그냥 걷는 것이 속도 편하고 운동도 된다고, 머리는 생각하나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간혹 서울에서 한잔하고 막차를 타면 밤 12시 50분쯤 역에 떨어진다. 물론 시골의 버스는 끊긴 지 오래이다. 걸어야 한다. 또 주우1이 역 근처로 이사 가면서 역 앞에서 한잔 하는 일이 늘었고, 그래서 일 잔 후 인적 없는 길을 걸어오는 일이 더 빈번해졌다.

 한밤중 사람 없는 길을 혼자 걷는 일은 은근히 재미있다. 물론 소변 정도는 거리낌 없다. 무서운 산길은 아니지만 사람을 만나면 놀랄 정도로 아무도 없는 밤길이다. 

 한 번은 기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하는데 내 옆에 봉고차가 섰다. 창문을 내리며 동네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것이다. 멈칫.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도 술김에 타기는 했다. 알고 보니 동네 교회의 목사였다. 그리고 10분 남짓, 강압적 포교에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그저 차 안에 구겨져 있어야 했다. 이런 상상이나 하면서. 그 밤중 여자가 창문을 내리고 타라고 하면 어떨까? 더 무섭다. 마을마다 귀신 얘기는 다 있지 않던가? 

 조금 더 걷는다. 하필 울긋불긋 모텔 네온사인에 보름달이 걸려있다. 나도 한번 잔 적이 있는 모텔이다. 10여 년 전, 전세금을 올려달라는 통에 동네 안에서 이사를 해야 했다. 그런데 엄마가 방향이 안 좋으니 이삿짐은 딴 데다 두고, 서쪽에서 하루 잠을 자고 다음날 들어가라고 했다. 뭐, 큰일도 아닌데 속 편하게 엄마 말을 듣기로 했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딸아이와 여편, 나 이렇게 셋이 그 모텔에 들었다.

 사장님도 참, 그냥 온돌방 주지, 빨간색 동그란 침대에 천정은 온통 거울이었다. 아이는 생전 처음 보는 불그레죽죽한 풍경에 그저 신나 방방 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텔레비전 옆에 가지런히 놓인 콘돔부터 치웠다. ‘아, 예전엔 다 돈 주고 샀었는데.’ 그 밤, 아이와 여편은 보글보글 기포 올라오는 욕조에 들어가 한 시간 넘게 때를 밀고는 지쳐 뻗었다.


밤길 1 (530*453)


 모텔을 지나 1km 남짓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이 이어진다. 오른쪽으로 낮은 둔덕이 길을 따르고 그 너머에는 기찻길이 있다. 날이 쌀쌀해지면 갑자기 아랫배가 불편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찬 술과 매운 안주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별 문제는 없다. 둔덕을 넘어가 쭈그려 앉으면 그만인 것이다. 시골이니까.

 그렇게 다소 불편하게 앉아있을 때 간혹 기차가 지난다. 곽재구의 시가 떠오른다.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런 상념에 잠겼다가 아뿔싸, 자칫 뒤로 주저앉을(끔찍하죠?) 뻔한 경우가 아주 드물지는 않다.

 가로수가 끝나는 즈음이었나? 밤이면 2~3분에 한두 대 차가 지나는 길에 경찰차가 두 대나 서있다. 경찰차를 보고 반가워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죄 많은 자, 동네를 살살 뛰다가도 이동식 과속단속장치를 보면 움찔 속도를 줄이고, 걸어서 집에 가다가도 음주단속 현장을 지나면 가슴을 쓸어내린다.

 내가 다가가자 갑자기 운전석 문이 열리더니 경찰관이 내린다. 나에게 용건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그 경찰관은 바로 내게 다가온다.

 “조금 전에 뭐 찍었나요?”

 길가에 꽂혀있는 이동통신 중계기가 밤에 보면 나무 같아 보였다. 로봇세상의 나무라고 할까? 좀 특이한 경우라 지날 때마다 사진을 찍고는 했다. 경찰에게 뭐,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 옆으로 여자 한 명이 지나간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보니 사진 구석에 작게 여자의 모습이 담겨있다. 경찰은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음단 끝났습니다. 조심해 들어가세요.”

 “음단이 뭐예요?”

 “아, 음주단속요.”

 ‘경찰도 말을 줄여 쓰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경찰이 한밤중에 길에서 사진 찍는 사람까지 관찰하고, 참 열일하는군.’ 했다가, ‘어, 나를 뭐, 이상한 놈으로 본거야?’ 기분 팍 상했다가, ‘차도 없는 길에서 음단을 하네. 이것도 열일인가?’ 했다가, ‘나는 안 걸렸네.’ 한숨을 놓았다가, ‘참, 나는 걸어왔지!’ 이렇게 현실을 깨닫는데,

 뭐 이런 밤길이다.


밤길 2 (453*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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