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지감치 그림일기 13
1.
누군가 ‘왜?’ 그림을 그리느냐고 물을 수 있다. 묻는다고 죄를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니, 그냥 대답을 찾아보자. 누군가 ‘왜?’ 술을 마시느냐고 물을 수 있다. 묻기에 대답을 찾다 보니, 이 둘은 궁색하게도 답이 비슷한 질문이었다.
화가 알렉스 카츠를 다시 소환해 본다. ‘예술은 내가 본 것을 당신에게 보여주는 방법이다.’ 술 마시는 일을 내가 감히 정의해 본다. ‘술은 내가 본 것을 내가 더 확대(과장)해서 보는 방법이다.’ 뭔가 아귀가 맞는다.
이 두 행위의 공통점은, 내가 느낀 무엇인가를 원재료로 하는 처리과정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본 것을 가지고 다른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이라는 점이 같다. 이 둘의 차이가 있다면 목적지가 남인가, 자신인가이다. 그러니까 남에게 보여주거나 아니면 자기 혼자 보거나이다.
그런데 이 둘은 상보적이지 않다. 같이 할 수도 있는 일이라는 말이다. 결국 ‘내가 본 것을 더 확대해서 보고, 당신에게도 보여줄 수 있다.’는 귀결인데, 현실에서 이런 작업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술을 마시고 그림을 그리는 누군가를 찾으면 된다.
그를 찾았다면 ‘지금 뭐 하고 있냐’고 물어보자. 그는 대답한다. ‘당신과 내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오. 그러니까 한 몸이 되는 것이지.’
왠지 사양하고 싶지만, 그의 눈에는 하고 싶은 말이 그득하다.
2.
하고 싶은 말을 풀어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지난 4월 말이었다. 옆 동네 광역시 예술가의 집을 지나다가 플래카드를 보았다. 미술대전에 참가하는 방법에 관해 작은 글씨로 꽉 채운 것이었다. 마감까지 3주가 남아있었다.
왼쪽 귀가 울었다. ‘한번 해봐. 손해 볼 일 없잖아? 어차피 그리는 그림, 큰 거 그린다고 생각하면 되지.’ 오른쪽 귀가 웃었다. ‘아이고, 그림 그린 지 얼마나 됐다고? 참가비가 5만 원인데, 그건 손해 아니냐? 그리고 쪽팔리잖아, 똑 떨어지면.’ 왼쪽 귀가 더 밉다. ‘너는 일상이 쪽팔리는 일이잖아. 뭐가 쪽팔려?’ 오른쪽 귀도 지지 않았다. ‘후진 그림 들고 왔다 갔다, 어우 더 쪽팔려.’
다음날 50호짜리 캔버스 하나를 집에 들였다. 그 이상은 차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여편께서는 허연 가구 하나 사 오는 줄 알았다고 이죽,
“좁은 집에서 잘해봐! 나중에 칸막이로 쓰면 되겠네.”
50호, 그 광활한 대지를 채울 이야기를 맞추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들락거리며 그림들을 구성하고 사진들을 맞춰보던 중 관장님을 만났다. 고등학교 미술선생님으로 퇴직하고 작은 갤러리 하나를 알차게 운영하는 관장님이다. 사진 몇 장을 보여주며 그림으로 그려볼까 한다고 넌지시 물었다.
“그냥 사진으로 보지, 뭘 그려?”
대화가 진전이 안 된다. 차후에 그림 일부를 보여주자,
“난 원래 그림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말 안 하는데. (핸드폰을 확대해 보더니) 근데, 야, 이거 참 표현이 구닥다리네. …아니, 뭐 그렇단 얘기가, 그게 아니라. …그걸 뭘 해?”
반면 그림 선생님은 용기를 불어넣는 덕담을 주셨다.
“김자까, 잘 해바아!”
붓을 들고 앉으니 눈 쌓인 히말라야 계곡 한가운데 혼자 버려진 느낌이 들었다. 산 하나를 그리다가 완전히 절망에 빠져 거칠게 붓을 빨았다.
‘역시 오른쪽 귀가 옳은 소리를 했어.’
그때까지 사진을 본 딸놈이 전화를 했다.
“아, 모 그렇긴 한데, 쫌만 더 해보시지?”
그럴지언정 하고 싶은 말을 풀어내는 방법은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