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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rabbit Oct 15. 2020

'엄마'라는 새로운 타이틀

잊지 못할 출산의 기억, 키키를 만난 날

무더위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여름의 끝자락, 출산 예정일을 12일 남겨두고 가진통을 느꼈다. 밤새도록 통증의 간격을 체크했고, 이른 아침 남편을 깨워 산부인과로 향했다. 이슬이 비치고 5일 만이었다. 손  닿는 곳에는 이미 당장 병원 퇴원 후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수건, 기저귀, 젖병, 손수건 등이 들어있는 10인치 캐리어가 준비되어 있었다. 보조석에 앉으며 ‘드디어 오늘인가!’하는 실감이 났다. 아침부터 도로는 출근 차량으로 붐볐고,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병원에 도착하니 긴장감이 몰려왔다. 


자못 진지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수술층을 눌렀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수술중’이라는 글자가 두꺼운 폰트로 새겨진 문이 양쪽으로 쓱 열렸다. 병원에서 제공해주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침대에 누었다. 간호사들은 긴장한 내 상태와는 대조적으로 무척 느긋하게 움직이고 있는 듯 보였다. 아직 아기가 나올만한 긴박한 상태가 아니었을 테지만, 그보다는 출산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일생에 한번 경험할까 말까 한 특별한 일이지만 이들에게는 매일 겪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통증을 느끼며 천장을 쳐다보고 있는데, 간호사가 다가와 내진을 하겠다고 했다. 커다란 손이 아래로 쑥 들어왔다. 묵직한 통증과 경련이 일었다. 싸한 느낌이 온몸에 번졌다. 목이 너무 말랐다. 간호사는 각얼음 하나를 종이컵에 담아 주고는 입에 물고 천천히 녹여먹으라고 했다.


‘산모님 일어나실게요.’하는 소리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수술실로 향하려고 발을 내딛는 순간, 복도 바닥에 붉고 물컹한 것이 쏟아졌다. 핏덩어리가 하얀 대리석 바닥에 선뜩하게 떨어졌다. 무서운 마음과 민망하고 부끄러운 감정이 교차했다. 아니, 민망함에 앞서서 이걸 치울 간호사에게 미안했다. 선명하게 붉은 피가 이곳이 상상 속의 산부인과가 아닌 현실 속의 산부인과임을 깨닫게 했다.


밤새 진통을 앓았다고 생각했는데도 병원에 도착하고도 9시간이나 진통을 겪어야 했다. 바른 자세로 누우면 숨쉬기가 힘들었다. 불편한 몸을 살짝 움직여 옆으로 누웠더니 배에 붙어있던 기구가 떨어져 간호사에게 한 소리 들었다. 몸을 쥐어짜는 고통 때문에 잠도 오지 않았다. 극심한 통증에 무통주사를 맞았지만, 산모가 열이 나서 자연분만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38도까지 열이 올랐고, 열이 안 떨어지면 제왕절개를 하자고 했다. 


자연분만을 하고 싶었다. 제왕절개보다 회복도 빠르고, 아기에게도 좋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8시간 가까이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끙끙 앓았는데 이제 와서 수술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호흡도 가빠졌다. 평소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잘 먹고 건강한 편이라 무리 없이 아기를 출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침대 위 내 몸이 내 맘 같지 않았다. 


양 겨드랑이에 얼음이 든 수건을 끼어놓고 병실 에어컨 온도는 낮추었다. 추워서 입술이 덜덜 떨렸다. 다행히 몸에 열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병실에 수술 기구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날카롭고 차가운 기기들이 위협적이었다. 아기가 나올 수 있도록 다리 위치를 고정하고, 간호사는 호흡법과 힘주는 법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몸 어느 곳에도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얼마나 힘을 줬을까. “못해요, 못 할 것 같아요. 악-, 저 안 될 것 같아요!” 나도 모르게 못하겠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 이 고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간호사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호흡을 고르며 다시 한번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보려 했지만 도대체 젖 먹던 힘이 뭘까, 알 수 없었다. ‘자연분만이고 뭐고, 당장 수술할래. 더 이상은 못해요.’라고 생각하는 순간, 아래로 엄청난 양의 물컹한 것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아기가 나온 후 태반과 양수 등 많은 것이 쏟아져 나왔다. 


남편이 가위를 들고 탯줄을 잘랐다. 탯줄은 질겼고, 싹둑 잘리지 않고 낑낑 거리며 잘라야 했다. 가위의 날도 진통과 출산의 고통에 가리어 무섭지 않았다. 손가락 다섯 개씩, 발가락 다섯 개씩을 남편이 확인하고, ‘엄마 가슴에 안으실게요’, 하는 소리와 함께 조그마한 생명체가 내 품에 안겼다.


키키가 세상에 태어났다. 


주글주글한 이마와 콧잔등 사이에 태변이 누렇게 묻어있는 아기는 처음 마주하는 세상의 빛이 낯선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초음파로 보던 그 아기가 내 품에 안겨 있었다. 감격스러웠다. 동시에 멍하고 얼떨떨했다. 10개월 동안 내 몸을 나눠 쓴 이 작고 여린 존재를 가슴에 품으면 단번에 눈물이 흐를 줄 알았는데, 좀 전까지 느꼈던 출산의 고통이 한순간에 끝나버려서 눈물이 나올 타이밍을 놓쳤다.


그 순간, 아기를 받아준 의사 선생님이 “생일 축하 노래합시다.”라고 말했다. 곁에 있던 간호사는 남편의 핸드폰을 받아 노래 부르는 순간을 영상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맞아, 오늘이 바로 키키의 생일이지!’ 남편은 간호사가 부르기 시작한 생일 축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참으로 기묘한 순간이었다. 동영상 속 나는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가슴에 안긴 아기를 내려다보고 있고, 남편은 얼떨떨해하는 표정으로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기는 신생아실로 옮겨지고, 나 역시 병실로 옮겨졌다. 조금 전에 아기를 출산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볼록했던 배가 사라졌다. 손가락을 펴서 배 위를 쓰다듬었다. 10개월 간의 임신한 여자의 삶이 끝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엄마'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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