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llorabbit Oct 15. 2020

분홍 초유

모유 수유라는 신세계,  출산하면 당연히 모유가 나오는 줄 알았어.

2주 동안 묵을 조리원에 도착했다. 신생아실 유리창 너머로 아기들이 같은 방향으로 머리를 두고 누워있었다. 키키도 자기 자리를 찾아 누웠다. 여차하면 다른 아기랑 구분을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더라. 내 새끼는 내 새끼구나, 열댓 명의 아기 안에서 내 아기만 도드라져 보였다.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가 분홍 꽃무늬가 그려진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헐렁한 원피스 아래 볼록 나온 배를 쓰다듬었다. 아기가 나오면 홀쭉해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배가 볼록하다. 체중계에 올라섰다. 출산 직전 몸무게 67킬로, 출산 후 몸무게 63킬로...? 응? 이게 뭐지? 키키 몸무게가 3.14 킬로니까 양수와 태반이 빠져나갔으니 적어도 5킬로는 빠져야 하는 거 아닌가? 체중계가 고장 났나? 


창문이 달린 조그마한 방 안에는 침대, 텔레비전, 화장대, 미니 냉장고, 개인 화장실 등이 구비되어 있었다. 홀가분한 몸으로 침대에 누우니 아기를 낳았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조리원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알차게 이용하며 푹 쉬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때 방 안에 전화벨이 울렸다. ‘키키 수유하시겠어요?’ 머리칼을 질끈 묶고 신생아실로 향했다.


수유실에는 이미 다른 산모들이 가슴을 내놓고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어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있는데 하얀 보자기에 싸인 키키가 나왔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배가 고픈지 칭얼거렸다. 젖꼭지를 물리고 가만히 아기를 내려 보니 신기했다. 이 조그만 것이 머리카락도 있고, 손톱, 발톱도 있고, 코딱지도 있다는 게 경이로웠다. 잘 펴지지 않는 손가락을 조심조심 펼쳐 보는데, 키키는 양껏 젖이 나오지 않는지 금세 젖꼭지에서 입을 떼고 울었다.


하루 세 끼 식사를 같은 층에 묵고 있는 다른 산모와 함께 했다. 이제 막 출산을 한 산모들은 푸석푸석한 피부와 머리카락으로, 밤새 수유하느라 못 잤는지 다크서클을 양 눈 아래 달고 테이블 앞에 마주했다. 어색한 첫 식사 이후, 서로의 젖 이야기를 하며 친해지기 시작했다. 아기가 젖꼭지를 잘 무는지, 젖은 많이 나오는지, 유축기로 한번 짜면 몇 미리 나오는지를 부끄럼 없이 공유하며 전우애 같은 우정을 쌓기 시작했다. 누구는 젖이 너무 많이 나와서 가만히 있어도 줄줄 흐르는데, 누구는 가슴을 아무리 쥐어짜도 나오지 않아서 아기마다 모유 불균형을 경험하고 있었다.


나는 젖이 안 도는 축에 속해서 조리원에 있는 내내 고달팠다. 수유실에서 잘 나오지 않는 젖을 아기에게 낑낑거리며 물리고 있는데, 다른 산모가 샛노란 초유를 젖병 가득 짜 와서 선생님께 전달하면 괜히 키키에게 못난 어미가 된 듯 미안해졌다. 젖꼭지가 짧아서 그런가 싶어 유두 보호기도 써보고, 쭈쭈도 써보지만 키키는 조금 빨다 말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조리원에 있는 동안 네 번의 가슴 마사지를 받았다. 가슴은 사정없이 주물러졌다. 위아래 좌우로 거침없이 출렁이며 돌려지고 주물려지고 꼬집어지고... 출산의 고통보다 가슴 마사지가 더 아팠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는데, 정말 너무 아팠다. 맨 정신으로 당하기에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다행히 가슴 마사지를 받으니 유선이 조금 뚫려서 젖병 바닥을 찰랑일 정도의 초유가 나왔다. 초유를 보는 반가움도 잠시, 동시에 고난이 시작되었다. 가슴에 젖이 돌게 하려면 적어도 3시간마다 유축기로 가슴을 자극해줘야 한다고 했다. 유축기를 사용하기 전 가슴을 부드럽게 주물러서 유축 준비를 하고, 양쪽 돌아가며 최소 30분은 작동해야 하니 2시간마다 한다는 것은 거의 매 시간 유축기를 사용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낮밤 구별도 없었다. 


밤 11시를 향하는 시간, 너무 졸려서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젖병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이미 젖꼭지는 살점이 떨어져 너덜너덜한 상태였는데, 유축기 깔때기를 따라 빨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젖병 안에는 노란 초유가 아니라 분홍색 딸기 우유 같은 피가 담겨 있었다. 조리원에 오면 요가하고, 마사지받고, 맛있는 거 먹으며, 밀린 책도 읽고 드라마도 보며 휴식을 취할 줄 알았는데, 핏빛 젖병을 들고 있자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하지만 심란함도 잠시, 아픈 젖꼭지의 고통보다 애써 짠 초유에 피가 섞여서 다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더 속상했다.


조금이라도 더 젖을 먹여보고자 매 끼니 든든하게 먹고, 간식도 빼놓지 않고 먹었지만 키키는 젖을 잘 빨지 못했다. 가슴에 젖이 돌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배고파서 우는 키키에게 분유가 담긴 젖병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점점 더 모유수유와 멀어져 갔다. 그래도 초유는 먹여야 한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과 노란 초유를 먹고 있는 다른 아기들을 보며 다시금 아픈 젖꼭지에 유축기를 돌렸다. 한 방울 뚝, 한 방울 뚝, 하지만 바닥을 다 채우지도 못하는 양이였다. 양이라기에 민망한 몇 방울이었다. 모유수유 스트레스 때문인지 지독한 두통을 느꼈다. 산후조리라는 말이 무색하게 조리원에서 학대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엄마가 아기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 모유'라는 문장이 부담스럽고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수시로 물을 마시고, 두유를 마시고, 모유촉진차를 우려 마셨지만 생각처럼 모유가 나오지 않았다. 출산 전에는 모유 수유가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느새 '분유만으로 건강하게 자란 아기'에 대한 글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유축기는 계속 돌아갔다.






조리원에 지내는 동안 즐거운 순간도 물론 많았다. 동기들과 출산과 모유 수유의 고단함을 나누는 시간, 좌욕기에 앉아 쉬는 시간, 골반교정기에 앉아 책을 읽던 시간은 조리원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잠시나마 내 몸을 돌보고 퇴소 후 맞이할 육아의 세계를 준비했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육아용품들을 로켓 배송으로 주문해서 다음날 바로 받아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하루는 남편과 출산 후 처음으로 만찬도 즐겼다.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보고 조만간 다시 오지 않을 외식의 기회를 즐기며 출산의 기쁨도 나눴다. 


같은 경험을 같은 시기에 했다는 동질감의 힘은 컸다. 혼자였다면 알지 못할 육아정보도 많이 얻었다. 그럼에도 산후조리를 꿈꾸며 휴식을 기대했던 것과 현실은 많이 달랐다. 한 가지 더 슬픈 사실은, 퇴소할 때 몸무게가 입소할 때에 비해  1킬로밖에 줄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전 11화 나의 엄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